한눈에 확 들어왔던 장면을 더듬어 보자면 중3 때인가, 학교 앞 문구점에서 본 말총머리 여학생의 뒷모습이었다. 둥그런 머리모양을 드러내며 끈으로 바짝 졸라맨 단정함 위로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게 나에겐 생기발랄 그 자체였다. 친구들 틈바구니 속에서 짧은 포니테일은 찰랑거리며 뭇 헤어들을 쓸어버렸다. 단발머리도 긴 생머리도 깻잎머리만큼 납작해졌다고나 할까. 또래 특유의 손짓과 몸짓으로 흔들거린 말총은 파장을 일으키며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던 나에게 큰 파도로 밀려왔다. 당시 비틀즈의 'Girl'을 들으며 소녀의 모습이 그럴 거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속 그림이 눈에 보였을 때 순간 정지 화면이 되면서 찰칵, 인화(引火) 돼버린다. 마음속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그런 경험이 살면서 몇 번이나 될까. 나이 들수록 드라이하고 루틴 해지는 게 인생이다. 삶의 무게에 고무줄처럼 늘어나버린 감성의 탄력은 긴장감을 튕겨내지 못하고 있다. '인생의 본문은 마흔까지'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언뜻 보면 마흔이 넘은 인생은 다 산 것처럼 보이지만 실망하지 말지어다. 이 철학자가 살았던 시기는 19세기 초로 그 당시 인간의 평균수명은 오십도 채 안 되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까진 아니더라도 그때 살았던 범인(凡人)들은 모두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은 인생의 본문을 산술적으로라도 80 정도로 봐야 하지 않을까. 늘어진 고무줄이 다시 팽팽해진다.
라디오에서 갑자기 귀에 쏙 들어오는 곡을 듣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도 아니고 7080 가요도 아니었다. 요즘 겨울에 어울리는 곡이라며 소개받아 한번 들어봤는데 너무 좋아서 한 시간이나 반복해서 들었어요... 청취자 사연도 곁들인다. 아, 나는 글을 쓰는 지금까지 듣고 있다. 올겨울 눈이 한 번도 내리지 않았음에도 '초설'이라는 곡명이 멜로디에 잘 스며있다. 라디오에서나마 기다리던 첫눈이 내렸다. 이미 유튜브에선 한 시간 반복 듣기가 올라와 있다. 2002년 발표된 곡이라니 요즘 노래 못지않은 세련미가 이십 년을 방부처리했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는 언뜻 비발디의 '사계'중 겨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난롯가에 앉아 있는 기분이랄까. 감상에 젖어든다. 흩날리는 눈발이 쌓여 창은 반쯤이나 흐려있고 ‘휘잉~’하는 바람소리에 더욱 아늑하게 느껴지는 오두막으로 공간이 확대된다. 감성을 파고드는 목소리와 어딘가 허전한 듯한 멜로디는 그 오두막에서의 사랑까지 떠올리게 한다. 그 상대가 누구였더라,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그때의 설레었던 기분은 세월의 삭풍에도 날아가지 않았음에 놀란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로 풀렸던 감성이 적당히 튜닝된 느낌이다.
사랑은 아쉬움이 더 큰가 보다. 그리움, 후회, 미련, 기대 따위는 멜로디에 녹아내려 듣는 이의 에필로그가 된다. 사랑의 시작은 아름답다. 사랑으로 코팅된 말들은 상대에게 황금처럼 빛나 보인다. 때로는 시간이 흘러 도금한 게 벗겨지는 현실에 부닥치기도 하지만 즉시 아픔만큼 성숙해진 걸로 결산하는 게 현명하다. 그래, 그때만큼은 진실했다고 자위하자. 기나긴 인생은 매 순간들로 점철된 하나의 연결고리니까. 인생은 과정이지 결과는 아니니까. 그래도 첫눈 내리는 날 돌아오기로 해놓고 배신한 옛사랑을 미련 없이 눈 속으로 묻어버리고 일어서는, 여자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만 하다. 곧 눈이 녹아 차가운 눈물(?)로 가슴속에 흐를 것임을 예견이라도 한 듯, 강변가요제의 ‘이별 이야기’에선 이렇게 노래했다.
영화 속 어느 한 장면처럼
달콤한 얘기들을 나누죠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선
이별의 싹이 트고 있다오~~♬♬
인생이 과정이라면 그것의 본문이 80으로 늘어난 이상 이런 눈물이라도 다시 흘려야 되지 않을까. 이미 청춘이 지나간 인생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는지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는 한마디 했다. '만약 내가 신이었다면 나는 청춘을 인생의 끝에 배치했다' 현대판 버전으로 바꿔야겠다.
'인생의 청춘을 길게~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