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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Nov 24. 2019

쓸모 인류


아니...


남들과 똑같이 대형마트에서 날짜도 보고 가격도 비교하며 '알토란' 같은 재료를 엄선, 기대감까지 살짝 얹어 집으로 날랐는데... 막상 인터넷을 요리조리 뒤적이며 시도한 음식은 요리도 아니고 조리한 보람도 없는 '밍밍함' 그 자체였다. 삼치조림이 그랬고 버섯들깨탕도 역시나였다. 인터넷상의 때깔 좋은 사진은 내 식탁 위의 맛깔스런 음식으로 재현되지 않았다. 집안에 어설픈 냄새만 가득했을 뿐 내 혀의 기대치는 넘지 못했다. 그냥 맵거나 짜거나 싱거웠지 새콤달콤이나 짭조름, 달곰쌉쌀, 얼큰칼칼, 쫀득쫀득하는 것 등으로 세련미를 갖추어 나를 황홀케 하지는 못하였다. 일단 소금이나 간장, 고춧가루의 본성을 잘 다스리지 못한 탓이렸다. 그 뒤로도 계속된 무모한 시도는 재료의 미덕(味德)을 살리는데 실패했다. 냉장고 안의 날재료들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도마 위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니 매일 해 먹는 집밥은 사료 수준에서 맴돌 수밖에...


사실...


나는 '맛' 이란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맛집 앞에 몇 시간 줄을 선다거나 멀리서부터 와서 미션에 성공했다 좋아라하는 사람들을 '극성맞다'라 쓰고 '맛의 노예'라 읽었다. 사람이 먹기 위해 사는 거나, 뭐 저렇게까지...  화장실에서 줄 서는 게 싫은 만큼 음식점에서도 그렇다. 왠지 X-ray 앞에 선 채로 나의 속사정이  드러나는 것 같아 뻘쭘하다. 아니 음식점 줄이 더 싫다. 화장실은 급하니 어쩔 수 없다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는 음식점은 당장의 욕구에 이성이 밀리는 것 같아서다. 아니면 딴 거 먹지... 가 나에게는 이성이었다.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고만고만한 사료 수준의 평이한 입맛으로 끼니를 때웠던 것이다. 재료에 신경 쓴 것치고는 가성비가 말이 아니다. 이렇게 십여 년을 보냈다. 맛집 탐방까진 아니더라도 집에서만큼은 기왕이면 맛있게 먹는 것이 비용에 대한 '나으~ 권리'가 아닐까나. 나이가 드니 점점 멋에서 맛으로 관심이 옮아간다. 결국 남는 건 먹는 것뿐, 대오각성이다. 나는 텍스트를 좋아한다. 내가 배운 모든 것은 거의 글을 통해서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으로 이해했어도 나중에 텍스트로 재확인해야 진짜 내 것이 되었다. 교과서를 텍스트북이라고 하던데. 하물며 통 성명할 때도 명함을 주고받아 확인하지 않으면 이름 석 자가 잘 기억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은 꼭 그렇지 않다...... ‘요리를 글로 배웠어요.’


이젠...


생존의 문제라기보단 품격의 문제다, 이 시대에 먹는다는 것은. 나이 들면서 음식의 양은 줄이되 질은 높이는 것이 정답이라고들 한다. 점점 기초대사량은 줄어드니 나잇살이 아니 찌려면 양을 줄여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 말한다. 과일이나 버섯을 말리면 당도나 영양분이 높아지는 이치를 식탁에도 적용해야겠다. 양이 줄어드는 만큼 강도 높은 미각으로 행복해지고 싶다. 맛있게 먹고 싶다. 맛있게 살고 싶다. 그런데 십 년 넘게 제자리걸음이다.


왠지...


이유를 알고 싶다. 올드보이의 군만두도 아니고 매번 그렇고 그런 맛에 길들여지기가 싫다. 맛에 대한 욕구가 원인을 따져 묻는다. 옛날에 엄마는 혼자 있는 점심때는 대충 김치에 물 말아 드신다고 했다. 아침식사에 자식들 도시락까지 한바탕 전쟁을 치렀기에 휴식이 필요했을 시각의 점심은 간단 처리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먹어줄 식구가 없는 이상 음식 마련의 필요성을 못 느끼신 게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지금의 주부들도 같은 심정일 게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요리를 배우고자 하는 의욕까진 안 나게 된다. 읽어주는 이가 없다면 글은 쓰기 싫은 법, 단지 자신의 입맛을 위해 지지고 볶는 건 단 며칠뿐이다.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지속적이면서 쉼 없이, 힘들어도 오히려 힘이 나는 건 '멕여준다'라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식구들의 갈등이나 반목도 한 상 잘 차려진 밥상에서 녹아내리기 마련이다. 찌개는 식어가도 그 사랑은 데워지니까. 이런 집밥의 힘에 기대다 보면 어느새 '집밥의 여왕'이 되는 터, 나에게는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혼밥의 운명인가 보다.


결국...


이런 생각이 든다. 외식의 부실한 재료와 조미료의 횡포에 민감해진 나는 너른 식탁을 장만해야겠다. 그에 따라 주방도 넓어야겠고, 음... 가끔가다 지인과의 외식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면 어떨까. 최근 읽은 책에선 사람의 쓸모를 요리에서 찾는다는데, 요리는 베풂을 전제로 한다나. 나이 들수록 베푼다는 것, 그것도 음식 나눔이 가장 큰 복으로 돌아온다고 들었다. 이미 함께 식사하는 즐거움부터가 복이 아닌가. 게다가 더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하고자 요리에 대해 배워볼 것이고 나 또한 사료에서 해방될 테니까, 이래저래 복덩이다.


잠시...


혼밥 중에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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