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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Nov 09. 2019

노인, 실전모의

발단은 이랬다. 팔팔 끓는 된장 뚝배기에 입맛 다시며 그날의 약속시간에 약간 서두르는    템포 빠르게 쟁반에 내려놓는다는  그만 기울어지며 사타구니에 쏟아붓고 말았다, 여전히 팔팔 끓는 된장 뚝배기를...  순간부터는 슬로우비디오로 느껴질 만큼  단위의 급박한 상황이 착착 닥쳐왔다. 나는 비명을 질렀으며 뜨거웠기에 차가워야 한다는 본능에 욕실로 뛰쳐나갔지만 엎질러진 국물에 슬라이딩으로 꽈당, 다시 한번 비명, 미끈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바지를 입은 채로 샤워기를 틀어 환부에 들이대었다. 표정은 일그러졌으며 낮은 신음은 계속되었다.


응급실에서 2도 화상으로 진단이 내려졌다. 표피를 지나 진피까지 손상된 경우로 '보일드 워터'에 의한 것치고는 심각했다. 그나마 찬물 샤워의 응급처치가 주효했다 한다. 입원치료가 원칙이지만 병원이 가까운지라 통원치료를 허락받고 매일 드레싱을 했다. 환부가 쓰라려 엉거주춤 병원을 오가는 게 급선무가 된 나로서는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건각으로 자부했던 두 다리를 쩔뚝거리게 된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몸의 밸런스가 깨진 게 원인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픔이 도사리게 될 줄은 몰랐다.


드레싱할 때 벌건 생살을 벅벅 문지르는 2주간의 고통을 끝으로 화상 부위는 점차 나아졌으나 또 다른 아픔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바로 다리 근육통이었다. 쩔뚝거리느라 어느 한쪽 다리가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여 절단 난 것이다. 엉덩이부터 허벅지를 지나 발끝까지 다리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근섬유들이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유발하는 통에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집안의 화장실이 어찌나 먼지, 마음만 바빴을 뿐 몸은 나무늘보였다.


곧바로 둘째 누나의 먹거리 출장 서비스에 이어 마침 뉴질랜드에서 온 막내 누나 내외의 과일상자를 앞세운 물량공세가 행해졌다. 그래도 차도가 없는지라 마지막 보루인 큰누나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선 편하게 삼시 세끼 집 밥이 받쳐주고 저녁땐 의사인 매형의 의료 지원까지, 보다 집중적이고 전문적인 케어가 가능했다. 이런 주변의 정성으로 열흘쯤 지났을까 근육통이 나아지는듯했다. 하지만 이번엔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쪽 무릎에 물이 찼다. 이미 순서는 정해져 있어 그 어떤 케어도 무의미했을까. 이 또한 깨진 균형 때문이리라. 한쪽 다리가 이미 팅팅 부어 무르팍이 애 대갈통만 해졌다. 더 기울어진 몸... 자, 이제는 지팡이 등장이다. 밑바닥 부분이 네 꼭지로 펼쳐진 영락없는 의료용 지팡이.



거의 한 달 만에 젊은 중년에서 노인이 된 나는 지금 지하철 노약자석에 당당히 앉아 있다. 지팡이를 다리 사이에 모셔둔 채. 머리에 희끗한 부분이 있다는 게 이럴 땐 고마웠다. 한 달 새 고생으로 얼굴 주름이 늘었나. 내가 육십 줄의 할머니한테 자리를 양보 받을 줄이야. 게다가 걸 마다하지 않고 날름 받아 앉을 줄이야. 인생사란 한 달 후도 내다보지 못함을 양보 받은 자리에서 내내 되씹어야 했다. 내릴 때 얼굴 찌푸리며 끄응~하는 것으로 양보 받은 것에 분칠했다.


지팡이란 게 신기하다. 요술 지팡이도 아닌 것이 북적이는 인도를 걸을 때엔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이 갈라졌다. 차량은 센서를 감지한 자율주행마냥 그대로 서 버린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어도 나에겐 무의미했다. 엘리베이터에선 먼저 내리도록 배려를 받았고 버스에서 천천히 내려도 모두 다 인내해 주었다. 계단 없는 저상버스가 이리도 편할 줄은, 사실 저상버스의 바닥이 낮아졌기에 도드라진 바퀴 부분이 불편했었다. 우리나라 지하철도 언제 엘리베이터를 곳곳에 설치했는지 어느 역이나 그것만으로 승강장에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편해진 상황에 어느새 익숙해져서인지 어제 김밥 집에서 주문한 메뉴를 셀프랍시고 종업원이 원칙대로 가져다주지 않은 것에 '노기'를 품어 다신 안 온다 다짐했다. 일시적 상황을 상시적인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나. 살면서 이렇게까지 길게, 여기저기 앓아본 적이 없어서인지 마음까지 약해지는 건 아닐까.


막상 지팡이를 짚으며 길을 나서니 배려를 느끼는 건 좋았으나 주변을 관조하게 된다. 지나가는 청춘에 부러움이 안 느껴진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나니...'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기대나 실망은 엷어진다. 선악이나 미추의 경계가 흐려진다. 내가 정말 요술 지팡이를 짚고 있나. 때마침 가을이라 떨어지는 낙엽부터 스산함을 더해준다. 노구(老軀)일수록, 짙어지는 단풍잎 따라 삶의 음영 또한 그러할진대 이를 어찌 감당할까. 보도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우울해 보인다. 겨우살이를 위해 나뭇잎을 떨어내는 것처럼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겠구나.


어느 누구에게나 노인은 언젠가 닥치게 될 자신의 모습이지만 이렇게 미리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집에 꼼짝없이 누워있을 때 아무도 없는 정적 또한 예약된 우리 노년의 삶일 것이다. 이래저래 우리가 주변 노인들을 통해 짐작할 뿐 구체적이지 못했던 상황을 주관적으로 미리 체험하니 예방접종이랄까. 그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마음의 대비로 담대히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운동이나 삶의 질을 관리하면서 노년의 수위를 완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왠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달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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