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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Oct 07. 2020

맛 vs 멋

아무리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해도 맛과 멋은 가는 길이 너무 다르다. 하나는 혀의 감각으로, 다른 하나는 눈의 사치로 배부르달까.


우리는 맛에 빠져드는 유년기를 지나 멋에 눈을 뜨는 사춘기를 맞이한다. 그래도 여전히 옛정을 떨쳐내지 못해 맛에 탐닉하다 보면 아... 이 둘은 서로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모두가 삶의 기쁨을 담당하는 양대 축이지만 그 사이에 끼여 우리는 고뇌한다. 맛과 친하자니 멋과 멀어지고 멋을 부리자니 맛과 절교해야 하고... 맛은 먼저 친했다는 이유로 강경하다.


우정이 어떻게 변하니?


학교 앞 문구점의 떡볶이를, 짝꿍이 건네준 초콜릿을, 졸업식 때 먹은 짜장면을, 출출할 때 생각나는 라면을, 생일 때 메인이었던 피자를 아니 어린이날 북적였던 뷔페식당의 그 모든 산해진미를 너는 어찌 멀리할 수 있겠니? 기쁠 때나 울적할 때나 난 언제나 너와 함께 했었다. 맛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여기저기서 절교선언이 들리는 통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다.


멋은 다소 여유롭다. 인간이 개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풀리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새로운 자각이 들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의식의 발견이랄까. 그것은 외모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를 이제는 돋보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거다. 우선 거울을 보고 유행에 기초한 자신만의 기준으로 외모를 판단한다. 하지만 판단은 흐려지고 거울에게 물어본다. 거울의 솔직함에 고민하다가 결국 무게의 초과는 다이어트에서, 형상의 조화는 운동에서 해법을 찾는다. 이도 저도 안될 시엔 의술에 기대야 하겠지만 그건 반칙이므로 여기에선 제외한다.


한 손엔 다이어트, 다른 한 손엔 운동이란 연장을 들고 자신을 가꾼다. 깎을 건 깎고 돋울 건 돋아낸다. 어디는 약간 슬림하게 또 어디는 조금 두툼하게, 거울이 조언하는 대로 자신을 조형해 나간다. 이제 먹는 즐거움보다 보는 즐거움, 더 나아가 보여주는 기쁨에 배부름을 느낀다. 사람이 어디 빵만으로 살까.


하지만 맛도 만만치 않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에 입맛까지 살짝 얹어본다. 몸에 새긴 습관만큼이나 혀를 통해 각인된 맛의 즐거움을 어찌 잊을까. 그것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태초(胎初)의 기억이기에 어떤 즐거움보다 앞선다. 게다가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 부여일 수 있고 그런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에너지 충전이기도 하다.


에너지 충전소는 도처에 깔려있다. 방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냉장고를 거쳐야 하고 지하철을 타려 해도 편의점이 버티고 있다. 보이는 맛의 유혹은 생의 본질을 자극한다. 어젯밤 먹방을 보다 라면을 도모한 죄로 아침에 얼굴이 부었어도 후회는 잠깐이다. 때론 먹기 위해 사는 삶이어도 괜찮다. 빵 없인 못 사는 게 또한 사람이다.


우리는 결국 맛과 멋이 팽팽히 맞서는 삶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둘 다 즐거움인데 한쪽은 버려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 이 줄의 끝은 무엇일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


폭풍 성장기에는 먹는 게 중요하다. 자식 사랑의 척도는 요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학교 갔다 집에 오면 항상 부엌에 계셨던 기억이 난다. 온갖 식재료들을 지지고 볶고, 모두가 나의 입으로 들어가기 위해 변신 중이었다. 그러니 가사의 대부분은 음식과 관련되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어릴 적 기억은 대부분 먹는 배경에서 시작된다.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식겁한 건 무심코 냄비 뚜껑을 열었는데 미꾸라지들이 허연 배를 내밀고 거품 물면서 서로 뒤엉킨 걸 보았을 때였고, 코피가 목구멍으로 계속 흘러 들어 갑자기 피를 토했을 때도 집에서 손님 치르는 밥상에서였다. 밖에서 놀다 밥때가 되어 들어오면 어김없이 그날의 메뉴는 구수한 냄새로, 지글지글 끓는 소리로 전해졌다. 그래서 나는 잘 먹고 잘 자랐다. 나중에 배우고 나서야 알았다, 이게 바로 ‘개체보존’이란 것을. 한 생명이 태어나 생물학적으로 발달 유지되려면 그만큼 섭생이 중요하다.


살찔 걱정 없이 마음껏 먹으면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신은 우리에게 먹은 만큼의 대가를 요구한다. 생물학적 성년의 초입인 사춘기를 지나면서 느닷없이 멋에 대한 자각은 왜 드는 걸까. 바로 '종족보존'의 시기가 온 것이다. 원초적으로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렇듯 외모가 눈에 걸려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운동까지 추가한다.


삶이란 심플하다.

자신이 양육되고 그다음 자식을 양육하는 것... 끝.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맛과 멋에 의해 동력을 얻으나 더욱 풍요롭고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필요하게 된 거고... 반백년을 넘게 살고 나니 이렇게 지나온 인생이 말끔히 정리된다. 결국 인생은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을 위해 달려온 것이다. 인류의 보존이라는 대전제하에 우리는 아등바등 살고 있음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미 태초에 인류에게 주어진 이 성경 말씀은 수천 년을 관통하여 지금까지 적용되고 있는 진리다. 그러니 식탐에 빠져있어도, 멋부리느라 정신이 없어도 언젠가는 균형감각이 되살아날지도 모르는 일, 혹 그러하지 아니한다 하여도  생육과 번성 중에 하나는 이루는 것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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