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남 2녀이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감탄사부터 연발한다.
”어떻게 그리 골고루 낳았을까? “
맞다. 조화롭다. 딸과 아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으니까. 첫째인 내가 딸이고 밑에 남동생, 그 아래에 여동생과 막내가 있다.
엄마는 4명을 낳을 생각은 아니었단다. 둘을 낳고 더 이상 낳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머니와 아버지가 더 낳고 싶어 했고, …… 그들의 유혹에 넘어갔다.
할머니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없이 자랐고, 형제자매 역시 일찍 돌아가셔서 외롭게 지냈기에 둘 보다 더 낳기를 바라셨다.
엄마는 입덧이 워낙 심해서 고민이 많았다. 나 역시 엄마를 닮아서 입덧이 장난 아니었다. 아기를 가진 순간, 내 몸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누군가 나를 조정하는 것 같았다. 임신하고 4개월이 될 때까지 토하고 토하다가 결국 링거를 달고 살았다. 내 입덧은 엄마에게 비할바가 못 된다. 엄마는 입덧하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고구마는 조금씩 넘길 수 있었단다. 토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토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서 뭘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와중에 농사일과 집안일을 했고, 네 명을 낳았으니…….
우리는 두 살 터울이다. 그런데 셋째와 막내와는 세 살 차이가 난다. 고민의 시간일 것이다. 실제로 막내를 낳고, 몸도 마음도 힘이 들었다고 한다. 그 힘듦을 막내는 재롱으로 채웠다. 지금도 막내는 성격이 제일 좋고, 뭐든 툭툭 털고 일어서는 오뚝이다.
나는 한창 자랄 때까지 언니나 오빠가 있기를 원했다. 내가 첫째라서 날 위해줄 언니나 오빠가 없는 게 무척 속상했다. 언니나 오빠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그들이 무조건 다 해 줄 것만 같았다. 정작 내가 동생들에게 이것저것 시키고 있는 걸 몰랐다. 내가 너무 많이 시킨다고 말해 줄 때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내 밑의 남동생과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싸웠다. 그날도 말로 투닥거리다가 몸싸움까지 갔는데 헉~ 한 대 맞았는데 너무 아팠다. 여태까지의 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 이제 얘랑 싸우면 안 되겠네. 주먹이 장난 아니구나.‘
반면에 여동생과는 싸울 일이 없었다. 네 살 터울이기도 했고 성향도 달라서 둘이 부딪칠 일이 없었다. 보통 자매들이 옷이나 물건으로 싸우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었다. 어찌 보면 철이 들 때까지 나는 여동생의 존재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것도 같다. 그건 아마 여동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여동생과 이런저런 일로 부딪치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고, 결혼을 준비하면서 얘기를 많이 하게 되었고, 서로를 챙겨주게 되었던 것 같다.
막내랑은 일곱 살 터울이다. 여름이면 동네 친구나 언니들과 개울가에 물놀이를 갔었다. 내가 어디를 가든 늘 막내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개울가에 물놀이를 갈 때는 괜찮았다. 함께 가는 언니들이 동생을 업어주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올 때였다. 물놀이에 지치고, 더위에 지쳐서 집까지 오려면 힘이 들었다. 걸어서 30~4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엄마는 내가 힘든 걸 아니까 개울가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여름에 물놀이만큼 신나고 재미있는 게 어디 있을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매번 올 때의 힘듦을 잊었다. 여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엄청 웃긴다. 까맣게 탄 마른 여자 아이가 눈을 찡그리고 있으니까. 그걸 누가 찍었을까. 지금도 궁금하기는 하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기에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우리 형제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살았던 동네에서는 삼 남매나 사 남매 많았으니까.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 친구들을 보니 둘이 많았고 가끔 셋이 있었다. 형제가 네 명인 경우는 드물었다. 형제가 어떻게 되냐고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았다. 형제가 많은 게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우리 형제는 모습이나 성격이 다 다르다. 같은 점이 있다면 내성적인 부분이 적다는 정도이다. 근데 성격은 조금씩 변하기도 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는 활발하고 외향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향적으로 변하기도 하니까. 내향적이다, 외향적이다는 어떤 상황이나 낯선 환경이냐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것 아닌가. 내 경우에는 그런 부분이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 물건을 사고, 무엇인가를 타인에게 요구할 때에는 조심스럽고 꺼려진다.
예를 들어서 학교생활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주도적이고 별 문제없지만 자주 가는 가게라도 외상으로 사 오라고 하면 가기가 두렵다. 고등학생일 때 가끔 엄마는 슈퍼에서 두부나 생활용품을 외상으로 사 오라고 했다. 외상으로 물건을 사러 가는 건 여동생 몫이었다. 나는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여 먹을 때 먹고 있는 반찬이 부족해도 더 달라는 말을 못 했다. 택시를 타면 기사 아저씨가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할 정도였다. 가능하면 말을 시키지 말았으면 했다. 그냥 조용히 목적지까지 갔으면 하는 게 내 마음이었다.
우리 형제는 운동신경이 좋아서 달리기를 하면 거의 대부분 1등을 했고, 소풍을 가면 노래자랑이나 장기자랑에 나가서 상품을 많이 받았다.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하거나 보여주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여동생과 막내는 싹싹하고 사람들에게 붙임성이 있으며 융통성을 잘 발휘한다. 반면 나와 남동생은 약간 고지식하고 답답한 면이 있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시내에 있는 병원에 함께 갈 일이 있었다.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버스 정류장에 갔는데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시골이어서 버스는 하루에 네 번 오갔는데 하필 막차가 가 버린 것이었다. 남동생은 울먹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데 여동생은 가만히 있다가
“오빠, 시내버스가 있다 아이가. 그거 타고 가자.”
여동생의 기지로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집으로 온 사건이었다.
여동생은 활발한 성격뿐만 아니라 얼굴도 작고 예뻐서 인기가 많았다. 여동생의 인기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사귀는 사람들도 많았다. 정작 여동생이 결혼하려고 제부를 데리고 왔을 때 엄마는 반대를 많이 했다. 1년간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국 결혼을 했지만, 둘이 싸우게 되면 엄마집에 가지 못했다.
“봐라. 내가 반대했던 이유를 알겠지?”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하니까 우리 집으로 왔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일주일. 여동생이 왔다가 간 방은 엉망이었다. 여동생은 청소를 잘하지 않고 지저분한 편이었기에 가고 난 뒤가 장난 아니었다. 제부가 매일 청소를 하고 있으니 둘이 잘 맞기는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