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미를 다르게 보는 방법
와..... 이 많은 일들을 다 해내신 거예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군대 행정학교라는 곳에서 만난 한 형님과 잠시 전생과 같은 사회 이야기를 나눌 때 그분이 나에게 해주셨던 말이다. 그분의 말에 괜스레 나의 마음이 움찔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벌인 일들을 다 해내지도 못했고, 당연히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난 일을 마무리하는 '뒤끝'이라는 것이 부족한 사람이다. 거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넓게 펼쳐 나가면 나갈수록 그 일들을 모두 줍는 것은 어려워져 갔다. 일을 끝까지 해내지 못한 것의 대가로 가끔은 사람들의 실망과 잔소리를 모으기도 하는 편이다.
용두사미 :
시작은 용의 머리처럼 웅장하나 끝은 뱀의 꼬리처럼 빈약하기 그지없다는 뜻
나를 오랜 시간 알아왔던 친구들이 꼭 한 번씩은 나에게는 이 사자성어를 들이밀곤 한다. '용두사미'라는 사자성어를 자신에 빗대어 표현한다는 사실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나도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일을 끝마치는 '뒤끝'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게도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단점이다. 이 점을 고치고 싶다는 생각에 바인더(플래너)를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난 마무리 맺기 실패한 과거들을 마주하는 것을 꺼려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잘 마무리되었던 일보다도 나에게 더 많은 사유와 경험을 챙겨주고는 한다. 그 경험에 분야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보드게임 동아리를 창설해 1년 만에 비활성화되었지만, 그 실패를 통해 운영자들의 역할 분배가 중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보드게임 제작 프로젝트는 제작 업체를 선정하는 마무리 단계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펀딩과 창업에 대해 면밀히 연구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제작 업체, 검수자 분들과 어떤 방향으로 미팅이 진행되는지 그런 과정들을 주도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마술회사는 문하생으로 입사하여 반년만에 작은 무대 한 번 올리지 못하고 퇴사했다. 하지만, 마술이라는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취미로서 재밌게 다룰 수 있을지 다짐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만족스럽게 하시고 계시는 마술 콘텐츠 인플루언서 '니키' 선생님에게 상담도 받으며 마술이라는 분야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 그려나갈지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만약 실패가 두려워 머릿속에 있는 마인드맵을 아끼기만 하고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이런 경험들과 사유를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작은 실패라도 마주한다는 일은 굉장히 마음고생을 하는 일이다. 나는 이 마음고생을 큰 리스크라 생각해 더욱더 나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에 나는 큰 리스크를 감당하진 않았다. 지나고 보면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이나 실패의 리스크는 크지 않다. 최근 『부자의 그릇』이라는 책을 읽고 다시 한번 느낀 것은 실패라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 역시 리스크이다. 가치 없는 경험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피도 안 마른 20대 초반 MZ의 말이 얼마나 설득력 가질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나는 말해야겠다. '용두사미'라는 것은 용의 머리처럼 찬란하고 화려한 시작을 해 본 사람만이, 뱀의 꼬리만큼이나 좋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경험과 사유를 겪은 사람만이 내세울 수 있는 하나의 커리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