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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st Aug 07. 2024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지금의 부모들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관계 속에서 만나냐에 따라 그 우호감이 결정된다. 부자(父子)관계로 만난다든가 상사-부하직원의 관계로 만난다든지 혹은 친인척 관계로, 친구관계로, 등등. 동일한 성격이면서도 만나는 접점에 따라 그 캐릭터는 달라진다. 그 관계속에서 요구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도 참 기구한 운명의 관계 속에서 만났다. 아버지와 아들이면서도, 선왕과 후왕으로서 한 나라의 국정을 좌우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네가 왕이 되어야 내가 살기 때문이다"


라는 영화 속 영조의 대사에 근거하여 보면, 영조는 사도세자가 왕이 되고 국정을 잘 펼쳐야 자신이 생존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왕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 생각부터 영조와 사도세자는 달랐다. 영조는 공부를 좋아하고, 사람보다는 예법과 제도가 우선인 것처럼 보였으나, 사도세자는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보다 근본적인 인간애에 대한 마음이 더 커 보였다. 이런 부자간의 관념 차이는 그 둘의 관계를 더욱더 멀어지게 만든다. 사실 생각의 차이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영조는 자신이 설정한 왕의 모습에서 벗어난 아들의 생각과 행동들이 심히 우려스러웠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면 왕권이 실추되고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의 위대한 업적을 존경하면서도 나는 이런 점에서는 동의하지 못한다. 사람은 참으로 매우 다양하고, 왕 또한 다양한 성격이 있으며, 이상적 군주의 모습은 오직 하나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조는 단지 불안했을 것이다. 그 불안감이 자신이 주장하는 이상적 군주에 대한 집착으로 이끌었고, 자신과 성격 자체가 정 반대였던 아들을 그 틀 안에 쑤셔 넣으려 했다.


아들은 단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자신의 기준에 충족하지 못한 아들을 보며 영조는 매우 분개하고 실망하였다. 그리고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도 아들을 질책하고 훈계했다. 매우 엄격했던 아버지를 둔 사도세자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점점 치솟아 오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사도세자는 울화를 억제하지 못해 해괴한 짓들을 하며 자신의 울화를 승화시켜 보려 하지만, 시간은 너무 흘러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형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실은 어쩌면 엄청난 효자였을지 모른다. '없는 놈.. 죽은 자식' 취급을 받았기에, 자신의 관을 짜고 관속에서 죽은 사람인척 지내왔고, '존재 자체가 역모'라는 수치스러운 말까지 듣게 되자, 아버지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칼까지 들고 아버지를 살해하기 직전까지 간다. 영조가 이제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줘야겠다고 신하들에게 말하는 이른바 '양위 파동'은 실은 쓸데없는 정력 낭비와 같다. 없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적극적인 만류를 바라보며 그들의 충성심을 확인해보려는 행위인데, 그런 양위 파동에서도 사도세자는 혼자 눈이 오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아버지가 왕위를 유지하기를 간곡히 요청했다.


아마 영조와 사도세자가 평민으로서 부자관계로 만났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사도세자에 대한 많은 요구사항도 없었을 것이고, 자신의 틀 안에 넣으려고 투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막 말하기 시작한 어린 사도세자가 강아지 그림이나 즐겨 그리고, 전쟁놀이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며, 아비로서의 영조는 조급했던 것 같다. 사도세자의 스승이 중간에 나서서, 조금 느긋하게 생각하며 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하는 게 낫다고 조언하지만, 영조는 듣지 않는다.



조급함


몇 백년 전의 영조의 모습은 현재 대한민국의 수많은 학부모들에서도 나타난다. '남들은 벌써 ○○를 하는데, 우리 아이는 너무 늦은 거 아닌가?' 하는 초조함과 조급함. 그로 인해 과열경쟁을 일어나고 너도나도 어린 나이에 학원 여러 개를 다니고, 아이들은 지쳐버린다. 어린 시절 경험했어야 할 것들을 모두 스킵한 채, 영어교과서와 수학 문제를 풀으며 귀중한 경험들을 놓쳐 버린다.


얼마 전 일어났던 전교 1등의 엄마 살해 사건을 보면서, 우리 시대에는 아직도 수많은 영조가 각 가정마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루 10시간씩 골프채로 체벌을 하며, 자신의 이상적인 아들의 모습을 설정하고, 그 안에 가두려는 집착이 강한 엄마는 결국 아들의 칼에 살해되었다. 해당 사건에서는 엄마의 죽음으로 끝이 났고, 영조와 사도세자의 경우 아들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안타깝게도 저런 관계에서는 결국 둘 중 하나가 끝이 나야 함을 시사한다.


영조가 조금만 자신의 고집을 버렸어도,

아들을 조금만 인정해주고 따뜻하게 한 번만 안아줬더라도,

저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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