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벌새>, 2019
이번에 키노즈에서 다룬 영화는 <벌새>. 오래간만에 상영관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라, 퇴근 후 혼자가서 보고는 울어버렸다. 비단 주인공 은희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라고 느껴져서.
하나.
사춘기의 기억을 툭툭 쌓은 듯한 전개
일반 영화의 서사는 매끄럽고 인과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벌새>는 1994년이 배경이긴 하나, 일련의 연결된 사건 구성이라기보다는 몇몇 에피소드가 두드러져 보이는 구성이다.
하지만 마냥 그 방식이 서툴러 보이지 않는다. 한창 은희가 가족문제로 힘들어하는 씬 다음에 은희와 친구가 방방이를 타는 씬으로 연결되는 다소 투박한 장면 전환도 '은희는 지금 다양한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고, 외부 자극에 예민한 상태야'라는 걸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 영화가 감독의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감안해보면, 어린 시절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토막으로 존재하듯, <벌새>는 20여 년 전 사춘기 시절의 기억들을 하나씩 툭툭 쌓은 완전체일지도 모르겠다.
둘.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만사형통은 아니다.
이 영화는 나에게 그동안 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던 것들을 강제로 마주하게 했다. "이건 너의 이야기이기도 해. 애써 외면해왔겠지만, 평생 모른 척할 수는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맞다. 김보라 감독이 자신의 10대 시절을 unfinished-business라고 언급했듯, 나의 유년시절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집안에 무언가 큰일이 생겨도,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이 영화에서 그런 '척'들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에피소드는 공부 안 하는 첫째 딸을 혼내는 남편을 말리다가, 아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분노를 터뜨린 장면이다. 그녀가 홧김에 던진 램프의 유리가 깨졌고, 떨어져 나간 파편을 맞은 남편의 팔에서 피가 났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아침 은희가 일어나서 본 광경은, 엄마 아빠가 아무렇지 않게 거실에서 tv 프로그램을 보며 웃는 모습이다. 은희만 이상한 사람인 된 것 마냥, 전날에 아무런 잡음이 생기지 않았던 마냥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tv를 보며 웃는다. 카메라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은희와 거즈가 붙여진 아빠의 팔을 번갈아 가며 계속 보여주는데, 보는 내 마음이 더 착잡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해도 거즈와 소파 밑에 들어가 있던 유리파편은 지난밤의 일이 현실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소파 아래 깊숙이 자리 잡았던 유리파편은, 얼핏 보면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곪아있는 우리네 집안의 메타포인 셈이다.
셋.
방법에 관하여
1994년 10월 21일, 하루아침에 성수대교가 무너지자 그 날 저녁 아버지는 별 일 없는 것처럼 식탁에 앉아 '밥 먹자'라고 한다. 큰 아들 대훈이는 참지 못하고 울어버리고, 큰 딸 수희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다.
아, 그냥 이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불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인 게 아닐까? 자신의 감정을 적당한 때에 잘 드러내는 법, 때론 타이르는 방법이 서투른 사람들 같았다. 처음 겪는 일이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하며 어버버 한 상태라도 애써 혼란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게 당연하다 모두에게 처음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럼에도 은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은 물론, 자녀들을 대하는 방식도 어딘가 잘못되어 보인다. 자아를 가진 개인보다는 집단의 부분으로서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그랬던 걸까. 어느 정도 관련성은 있어 보이지만, 단정하기엔 너무 복잡한 문제다.
그냥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은희의 부모님은 사회적 제도와 가정이라는 틀에 묶어두고 살아왔던 그 시대 어른들을 재현해 놓은 캐릭터라는 점. 엄마가 자신의 속마음을 '폭발'이 아니고선 드러내지 못했던 이유에는 분명 90년대 사회의 영향이 있다는 점. 그것들이 잘못된 방법(방식)이었음을 지금의 우리는 안다는 점이다.
넷.
영지 선생님
스스로가 싫은 적은 없었냐는 은희의 질문에, 너무도 많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어른. 그만큼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법을 아는 사람.
영지쌤을 보며 친구는 자신도 그녀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얘기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큰 영향을 미칠 어른이 될 수 있기에 내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게 어렵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기엔 부족하다.
교육자들의 어깨가 무거운 건 이런 이유이지 싶다. 내 고등 시절만 돌이켜도 선생님들의 말하나 행동 하나에 영향을 받았던 10대의 내가 보인다. 한 번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하루는 독후감을 쓰기 싫어서 인터넷에 있는 줄거리를 베끼고, 그 줄거리만 보고 대충 소감을 적어서 낸 적이 있다. 베껴낸 것을 알아챈 국어 선생님은 나를 불러 얘기했다.
“너 같은 모범생이 이런 행동을 하다니 정말 실망스럽다”
이 한 마디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그 말은 나를 ‘모범생’이라는 틀에 얌전히 갇히도록 했다. 약간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10대의 기억이다.
친구의 말마따나, 이러한 경험을 ‘앞으로는 하지 말아야지’라는 ‘자양분이 된 경험’으로 듣기 좋게 마무리하는 건 더 이상 안된다. 그냥 그렇게 모든 나쁜 일을 자양분 혹은 교훈을 준 일로 치부 하기에는 이건 아니지 싶은 일들이 꽤 있다는 거다. 영지쌤은 은희가 겪은 일들에 대해 ‘지나고 나면 다 너에게 득이 될 거야’라고 하지 않는다. 은희에게 가해지는 오빠의 폭력 따위에 무너지지 않게 짧지만 단단한 말을 해준다. 이 외에도 그녀가 은희에게 한 말들은 은희를 거쳐서 나에게 관통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삶은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다는 것”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무언가 나눈다는 것”
“그 사람들을 쉽게 동정하면 안 돼”
“왜요?”
“잘 모르잖아”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에는 은희의 경험과 비슷한 일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벌보다 더 부지런한 날갯짓으로 꽃을 찾아다니는 ‘벌새’는 은희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 안에는 은희와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곳곳에 있다. <벌새>는 우리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