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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빨간 콩나물 반찬

나의 컴포트 푸드

by 이주아

방금 전 브런치 팀의 한식문화 공모전 공지글을 읽다 보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친할머니가 떠올랐다.


20세기 초 경기도 어느 시골에서 태어나신 할머니는, 만 16세가 채 되기도 전에 어느 종갓집으로 시집오셨다.


할머니가 시집오셨을 당시 할아버지 가족은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아버지 여동생 이렇게 셋 뿐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서 자녀를 둘밖에 못 보셨단다.

그래서 할머니에게는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짐이 지워졌고, 시집오자마자 아이가 생기는 족족 모두 낳았다. 잘 먹지도 못하던 그 시절, 아이를 낳고 다음 날부터 몸 풀 새도 없이 밭에 나가 일하셨다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할머니는 선천적으로 대단히 튼튼한 몸을 가지고 태어나신 듯하다.

아이를 낳고 다시 임신 가능한 몸이 되면 바로 임신을 해 또 다른 아이를 낳기를 폐경이 될 때까지 계속하시면서 12명의 자녀를 낳았다. 이 중 두 분은 아이 때 돌아가셨고, 남은 열 분 중 아빠가 순서상으로는 넷째, 아들 중에서는 장남이시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는데, 꽤 엄격하고 깐깐한 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절 시골에서 남편 없이 일꾼을 부리며 두 아이를 홀로 키워내셨으니 강단이 대단하셨던 분임에 틀림없다.

내가 보기엔 참으로 멋진 여장부지만, 이런 분을 시어머니로 모셔야 했던 할머니에게는 멋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바보 같을 만큼 속이 여리고 순하고 착한 분이었는데, 할머니와 정반대의 성정을 지닌 시어머니를 만나 거의 60년 동안 호된 시집살이를 하셨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이 열 명을 키우고 출가시키고 손주를 보신 그 집은 사실 내가 태어난 곳이다. 우리 엄마 또한 할머니처럼 시골 종갓집 장손과 결혼해 시할머니와 시부모님, 그리고 아직 출가하지 않은 아빠의 동생들과 함께 살았고, 아이 셋을 낳은 후 우리 남매가 학교 갈 나이가 될 때까지 이 집에서 함께 살았다. 세 남매 중 나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병원에 갈 새도 없이 산통이 시작된 후 바로 나오기 시작해 안방과 마루 사이 문지방에서 태어났단다.


서울로 이사한 후 여름방학 때마다 거의 한 달 간을 시골에서 지냈는데, 이때 할머니와 보냈던 시간들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기억들 중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것을 꼽으라면 ‘콩나물 반찬’이다. 당시 할머니 집에서는 소, 닭, 돼지를 키웠고, 밭에서는 한국 밥상에 오르는 대부분의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심지어 집안에서도 채소를 키웠는데, 바로 콩나물이다. 안방 아랫목에 늘 자리하고 있던 동그란 항아리 안에는 콩나물이 있었고, 물만 주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것이 엄청나게 신기해서 매일 들여다봤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잘 자라는지라,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에는 늘 콩나물 반찬이 있었다. 고춧가루를 넣어 빨갛고 국물이 자작한 우리 할머니표 특수 콩나물 반찬이다. 엄마표나 여느 밥집의 콩나물 반찬은 대개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담백한 스타일이라, 이 빨간 국물 콩나물 반찬은 할머니표 밥상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전 세계 음식 관련 피드들을 보다 보면 ‘Comfort Food’에 대한 얘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 일요일, 명절 등, 가족이, 아니 뭣보다 ‘엄마’가 생각나는 때에 이런 요리가 등장한다.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만져주는 나의 컴포트 푸드는 할머니표 빨간 국물 콩나물 반찬이다.


컴포트 푸드를 생각하게 한 브런치 팀의 공모전 덕분에 오래간만에 할머니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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