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개코 인생
내 오감 중 가장 민감한 감각은 후각이다.
어릴 때부터 냄새를 잘 맡는다고 주변인들로부터 ‘개코’라 불렸다.
개코 덕에 큰 일도 여러 번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몸살이 나 결석을 하고 집에 누워 끙끙 앓고 있는데, 어디선가 탄 냄새가 나 엉금엉금 기어 주방에 가봤더니 가스레인지 위에서 냄비가 새카맣게 타고 있어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냄비를 불에 올려놓고 잊고 나가신 엄마가 돌아오신 후 나를 끌어안고 잘했다고 여러 번 토닥이셨던 기억이 난다.
이 외에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엄마 말씀에 의하면 내 개코 덕분에 불이 안 났던 때가 몇 번 있었단다.
그런데 개코를 가진 당사자는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길을 가다 맛있는 냄새가 나면 배가 고파지고 역한 냄새가 나면 괴롭다. 늦은 밤 지옥철을 타면 열 번 중 아홉 번은 거하게 한잔하시고 귀가하는 분들로부터 풍겨 나오는 소주+마늘+삼겹살 냄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래도 음식 냄새는 그나마 참을만하다. 썩은 생선 냄새만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음식 냄새보다 더 못 견디겠는 냄새는 향수 냄새다. 여러 화학물질이 범벅되어 있는 것 같은 인공적인 냄새가 내 코엔 어쩜 그리 독하고 역겨운지. 그래서 1층이 향수 매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백화점으로의 쇼핑 나들이는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당연히 향수는 쓰지 않으며, 향수를 진하게 뿌리는 사람과는 친해지기도 어렵다. 이런 내가, 향수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자 향수 없이 못 사는 사람들로 가득한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6년을 살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4천 년 전 인류가 향료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때 쓴 재료는, 음식에 풍미를 더하는데 쓰이는 각종 허브와 향신료, 견과류 등이었다는 것이다.
후각이 남다르게 발달한 나는 요리를 할 때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뭣보다 냄새로 음식의 맛을 가장 먼저 판단한다. 눈으로 보기도 전에 냄새부터 맡게 되니, 냄새가 별로인 음식은 제아무리 멋지게 플레이팅 했다 하더라도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으며, 이미 냄새로 데미지를 입었으니 혀로 느껴지는 맛도 별로다.
같은 이유로, 음식 재료 중 내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들은 허브와 향신료이다. 음식의 맛과 향을 주도한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재료들은 과하게 쓰면 음식을 망칠 수 있지만 적절히 쓰면 그야말로 더없이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성의 재료들이다.
한국음식에 주로 쓰이는 향신료와 허브는 고추, 마늘, 생강, 깻잎, 부추, 쑥갓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마늘과 고춧가루는 내 요리 대부분에 들어갈 정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료이다. 이 두 가지가 들어가지 않으면 왠지 완성되지 않은 맛인 것 같달까.
깻잎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이것은 해외살이를 시작한 후 구하기가 힘들어 더더더 좋아진 경우이다. 해외살이를 하는 한국인들 모두에게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는 깻잎을 먹겠다고, 나는 매년 한국에서 씨앗을 공수해 직접 키워 먹고 있다.
해외 살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십 년도 더 전에 호주에서 만난 음식의 신세계 중 내 후각과 미각을 가장 강력하게 자극했던 것은 바로 생전 처음 맛보는 이국적인 향신료와 허브들이었다. 고수, 바질, 민트, 커민, 강황 등, 이름뿐만 아니라 냄새도 맛도 생소한 재료들. 요리책을 보고 새로운 요리를 시도할 때마다 향신료를 하나둘씩 사들이다 보니, 어느새 내 주방의 찬장 하나는 향신료병으로 가득 채워졌다.
당시 나는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향신료 코너에서 향신료 종류를 살펴보느라 장보는 시간이 두어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새로운 재료에 눈을 뜨면서 슈퍼마켓 죽순이가 된 나는, 지금도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서는 제일 먼저 슈퍼마켓에 들른다.
전 세계 모든 문화권의 음식을 현지에서 먹어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내게, 공항과 슈퍼마켓이 ‘최애’ 장소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