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에 물린 고기쟁이
나는 고기쟁이다.
좋아하는 고기는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순이다.
시뻘건 생고기는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아마도 요리 후 맛보게 될 음식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반면 생선은 아주 싫어한다.
어린 시절 기억나지 않는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개코라서 비린내가 싫은 건지, 어쨌든 생선은 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먹는 것도 싫다. 비린내 나는 비늘로 가득한 생선을 보고 있자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동물인 뱀이 떠올라서 더욱 싫어진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 생선회나 초밥은 거부감 없이 먹지만, 내 돈 주고 먹는 일은 거의 없다. 비린내는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맛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비싼 돈 주고 왜 먹나 싶은 거다. 같은 값이면 한우 같은 고급 고기를 먹지.
지난 한 달간 출장으로 필리핀 마닐라에 있었다. 주방이 딸린 호텔에 머물렀지만, 살인적인 업무 일정에 요리할 여유가 없었고, 기본적인 요리 도구만 갖추어진 곳에서 요리를 하자니 소금부터 기름까지 기본 재료들을 모두 사야 해서, 요리할 생각을 접고 모든 끼니를 외식으로 해결했다.
한 달간 먹은 고기 중 70퍼센트가량은 돼지고기였다. 여러 음식점에 다니면서 알게 된 점은, 필리핀에서는 돼지고기가 가장 흔한 고기라는 점이다. 필리핀 대표 음식인 레촌을 비롯해, 일본식 돈까스, 라멘, 돼지고기가 들어간 중국식 만두, 한국식 숯불갈비 등 다양한 돼지고기 요리를 먹었다. 그러다 가끔 소고기가 땡기면 다소 비싼 '서양음식점'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러다 보니 출장 막바지 즈음에는 돼지고기가 쳐다보기도 싫어질 지경이 되었다. 매일 테마가 달라지는 호텔 조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베이컨도 마지막 며칠간은 먹지 않았다.
마닐라를 떠나기 며칠 전, 그간 몇 번 가본 퓨전 일본 식당에 들렀다. 이미 고기에는 물릴 대로 물린 터라, 눈 딱 감고 생선요리를 주문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음식 맛은 보장할 수 있었으니 믿고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주문한 요리는 전형적인 생선 냄새가 가장 적을 것 같은 대구 구이. 된장 소스를 발라 구웠단다. 여기에 흰쌀밥과 미소국을 곁들여 먹었는데, 대단히 훌륭했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씹는 맛에 감칠맛에 속까지 편한 이 요리를 왜 이제야 주문했나 후회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대구살을 사다가 직접 해 먹어 볼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려면 비린내에 대한 내 트라우마를 없애줄 아주 자극적인 뭔가가 필요할 것이다.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슈퍼마켓에 다녀왔다. 먹을 것이라고는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되는 아몬드드링크와 시리얼, 피클, 냉동고에 얼려둔 고기뿐이니, 야채와 과일, 계란 등 신선한 재료가 필요했다.
슈퍼마켓에 가면 보통 정육코너에 제일 먼저 들르는데, 오늘은 정육코너는 가뿐하게 패스하고 야채와 과일 코너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며칠, 혹은 몇 주간은 채식주의자로 지내게 될 것 같다.
기름진 음식으로 며칠간 위장을 혹사시키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고 1월 한 달 동안 Veganuary (Vegan + January)를 선언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백배 이해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