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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선 Feb 27. 2017

마지막까지 꼭 봐야 하는 전시회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 展을 보고

"그 어떤 현대의 건축가도 이 남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르 코르뷔지에 展을 보고 -

가) 헛소리로 시작하는 도입부

 오늘도 안암동 5가의 5평짜리 반지하 방구석에서 눈을 떴다.

 평일에는 연남동의 (무려) 방 3개짜리 회사 숙소에서 지내지만, 주말이면 나와 동생이 함께 사는 작은 자취방으로 돌아온다. 삐그덕 거리는 싱글 침대에서 동생을 재우고, 내 자리는 딱딱한 라꾸라꾸다. 내가 착한 형이라 그렇다거나, 동생한테 맞고 사는 형이라 그렇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동생은 침대가 아니면 못 잔대서, 나는 침대 아니어도 잘 자니까 그러라고 했다. 평생을 내가 입은 헌 옷 물려받으며 자란 놈인데, 이 정도 양보는 양보도 아니지. 무튼 우리 빌라는 한 층에 집이(아니, 방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5개씩 빽빽이 등을 맞대고 있다.

 처음 이 방에서 자취를 시작할 때만 해도 윗 층 여자와의 동네 주민 로맨스를 기대했었다. 쓰레기 버리러 나가다가 빌라 현관문에서 마주치고는 생긋 웃으며, '202호 사세요? 헤헤' 뭐 그런 거 말이다. 현실은 2년 이 다 돼가도록 옆 방 여자 얼굴 한번 본 적 없다. 왼쪽 방 여자도 모르고, 오른쪽 방 여자도 모른다. (솔직히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른다. 그냥 남자보단 여자가 살고 있기를 희망할 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왼쪽 방 여자가 비밀 번호를 한 번 틀리고 집에 들어온다.(이 여자는 매날 한 번씩 틀린다) 그렇다고 불쑥 뛰어나가서 안면을 트자니, 호기심이 귀찮음을 이기지 못한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지금 분홍색 토끼가 그려진 수면바지를 입고 있다는 이유도 한 몫했겠지...


나) 여전히 헛소리 같은...

 아, 오랜만에 글을 쓰니까 그런지, 처음으로 후임이랑 근무 나간 일병마냥 헛소리가 길었다. 어쨌든 오늘 나는 그렇게 조그마한 방구석에서 뒹굴다가 문득 '오늘 하루만큼은 허송세월 보내고 싶지 않다'는생각에 벌떡 일어나 네이버에 '전''시'라고 쳤다. 네 번째 즈음에 조금이나마 흥미를 끄는 게 있었다.

'현대건축의 아버지 4평의 기적_르 코르뷔지에 전'

 조금 찾아보니, 아파트나 빌라 같은 현대식 공동 주거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란다. '4평의 기적 같은 소리, 이 자식 때문에 내가 이노무 방구석에 살고 있는 거구나'(물론 우리 집은 5평쯤 된다) 그렇게 나는 수면바지를 벗어던지고 르 코르 뭐시기의 낯짝을 보러 나섰다. 실로 오랜만의 전시회 관람이었다. 티켓은 무려 만 오천 원이었으나, '혼자 일요일 오후를 예술의 전당에서 보내는 고상한 남자', '혼자 일요일 오후를 예술의 전당에서 보내는 고독한 여인과 혹시 모를 로맨스가 있을지도 모르는 남자'라는 기분을 느끼기에 전혀 아깝지 않은 금액이었다.


다) 아파트를 만든 남자(이제 진짜)

 지금부터는 진짜로, 헛소리는 그만하고 내가 오늘 느꼈던 작은 충격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르 꼬르뷔지에는 쉽게 말하면 '최초의 아파트를 만들고, 철근콘크리트 방식의 건축을 대중화시킨 남자'다. 그래서 현대건축의 아버지, 아파트의 아버지, 콘크리트의 아버지 등으로 불린다. 혹자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그 어떤 현대의 건축가도 이 남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입구에서부터 이 남자에 대한 온갖 간지 나는 명언들 때문인지, 나는 시작부터 굉장히 겸손해졌다.

 그리고 둘러보는 내내 적잖이 놀랐다. 아파트를 만든 사람이라길래, 얼마나 칙칙하고 딱딱하고 형식적 일지. 그런 전시회는 세상 재미없는 전시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무려 2시간 동안 모든 전시물을 정말 몰입해서 '읽어'나갔다. 아주 몰입해서. 일단 건축가임에도 불구하고 설계도면보다 데생이나 회화가 훨씬 많았다. 그 스스로 자신을 건축가 이전에 화가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그림들을 남겼더라. 물론, 그의 모든 그림들은 그의 건축에 영향을 미쳤고.

 하지만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의 그림들이 아닌 그의 건축 사유였다.

'삶 자체가 하나의 건축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다.'

라고 말한 그는 사유를 통해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상당히 중요시했다. 그렇게 찾아낸 본질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이를 실제 건축에 접목시켰다. 지금의 아파트가 어떻고를 떠나서, 그가 최초의 아파트를 구상하게 된 이유는 건축에 대한 본질과 그 시대 건축가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라) 그의 철학과 사명감(시대적 필요)

 르 코르뷔지에 이전에는, 그러니까 20세기 이전에는 건축이 사람을 위하지 않았다. 신을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모든 것이 웅장하고, 아름답고, 예술적이며, 위대해 '보이도록' 지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건축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고 여겼다. 그에게 있어 건축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본질적으로' 건축이란, 권위적이고 위협적이기까지 한 공간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편안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건축에 대한 그의 본질적 사유는 1차 세계 대전을 만나 더욱 커졌다. 전쟁으로 인해 그전까지 지어졌던 거의 모든 건축물들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지었던 벽돌 건물들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그리고 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살 곳이 필요했다. 편리성과 실용성이 건축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철학은 이런 시대 상황이 맞물려 더 이상 한 개인의 작품 세계가 아닌, 시대적 필요가 되었다.


마) 필요와 비난 사이

 그렇게 그는 벽돌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한 건축을 상용화시켰고, 벽/기둥/계단이라는 단순한 요소로 간편하고 실용적인 건축방식을 개발했다. 그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더 저렴한 비용으로 최소한의 공간을 활용해 최대 효과를 낸 편안한 공간을 만들까'를 고민했다.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한 공간
일부 집권세력이 아닌 대중을 위한 공간
그랬기에 효율적이면서 편안해야 했던 공간
그것이 바로 그의 건축가로서의 사명감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모든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 그랬듯, 그의 건축물도 당대에 엄청난 비난을 맞았다. 세계 최초의 아파트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정신병의 온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며, '건축 예술이 사라진다'는 악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더 효율적으로 더 실용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건축관으로 옮겨갔다. 시대적 필요/사명감 그리고 기존의 고정관념/비난 이 두 가지 양극단 사이를 고집스레 걸어간 것이다.


바) 모듈러의 등장

 그렇게 등장한 것이 바로 '모듈러'다. 제한된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딱 맞는 적절한 공간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가 키 183인 사람의 몸 비율을 기준으로 실용적 공간의 황금비율을 고안한 것이다. 모듈러 역시 '정신병적으로 철학을 추구했다'며 비난받았으나, 2016년 그의 건축물은 무려 17개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며 '그가 옳았음'을 증명받았다. 그리고 현대의 건축물에도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키가 171이니까(170인데 올린 거 아니고 진짜 171이다),
무려 12센티나 과분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 거구나.


사) 그에 대한 나의 오해

 어쨌든 나는 그런 그의 철학을 알아갈수록 마음 한 구석에서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인간을 위한 건축 철학을 갖고 있었지만, 그런 그가 만든 아파트는 오늘날 너무나 비인간적인 삶을 만든 게 아니냐'라는.

'그가 위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너무 자신의 논리에 빠져 생각의 시작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은 게 아니냐'라는. 아마도 전시 마감 10분 남았다는 매니저? 들의 재촉 때문에 마지막 한 코스를 보지 않고 나갔더라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에 대해 이렇게 오해했을 것이다. '인간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인 건축을 만든, 지나치게 철학적이었던 건축가'라고.


아) 다행히도 마지막을 봤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마지막 코스를 봤고, 이런 나의 생각이 그에 대해 매우 무지하고 모욕적인 평가였음을 알게 됐다. 그 마지막 전시물을 본 순간 마치 뒷 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전시물의 이름은 우리 모두가 잊고 있던 이 전시회의 이름, '4평의 기적' 그가 실제로 살았던 4평짜리 작은 '집'이었다.

 그렇다. 그는 위선적인 철학 쟁이가 아니었다. 진심을 다해 건축의 본질이 '인간'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효율적이고 편안한 공간'만 있으면 되는 거라고 믿었다. 이게 '모듈러'로 대변되는 그의 건축 철학이었고, 그는 실제로 누구보다 작고 효율적이면서 편안한 4평짜리 작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그는 본질에 입각해 철학을 세웠고, 그 철학을 '진심으로' 실천하기 위해 살아갔다.

 어쩌면 오늘날 아파트가 비인간적인 공간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그의 철학을 본질(인간 중심)이 아니라

껍데기(실용성, 효율성)로만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 됐든 4평이면, 나의 안암동 자취방보다도 작은 공간이다. 그 작은 공간에 살면서 누구보다 위대한 공간을 만들어낸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 나는 오늘부터 그를 존경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안암동 자취방을 (물론 어렵겠지만) 조금 더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르 코르뷔지에와 그의 부인 이본느는
자신들의 4평짜리 집을 '작은 궁전'이라고 불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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