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의 북부 탄광촌에서 사는 11살 소년 빌리의 이야기이다. 빌리가 복싱을 배우러 가는 길에 발레 수업을 우연히 보게 되고, 여학생들 뒤에서 발레 동작을 따라 하게 된다. 그런 빌리의 재능을 알아본 발레 선생님은 로얄 발레학교에 오디션을 보라고 권한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빌리는 오디션을 보러 가게 되고, 심사위원이 빌리에게 묻는다.
“춤출 때 어떤 기분이 드나요?”
그리고 빌리의 명곡 ‘Electricity’가 시작된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요. 나 자신을 잊는 느낌 동시에 온전히 나 자신을 찾는 기분이에요. 나는 변화가 느껴져요 내 안에 불이 있는 것처럼 무언가가 터져 나와 숨길 수도 없죠. 한 마리의 새처럼 날아오르죠. 감전된 것처럼 내 안에 불씨가 깨어나면 나는 자유를 느껴요. 그리고 난 한 마리의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녀요. 감전된 것처럼 자유를 느껴요. “
라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빌리의 모습은 완벽히 음악에 사로잡혀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데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춤에 몰두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자유로워 보인다. 빌리의 행복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의 불꽃이 텔레비전 화면을 뚫고 나의 심장 속으로 들어왔다. 그 불꽃은 예전에 음악으로 불타올랐던 불꽃을 다시 살리는 듯했다.
나도 빌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미술과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흔히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노래를 시작하였다. 대학은 가야 하는데 지원하고 싶은 과는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었다. 미술은 손으로 익혀야 하니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고, 노래는 소리만 크게 내면 된다고 생각해서 조금 더 쉬워 보였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성악을 해보라고 권하셨던 적도 있어서 노래를 선택하게 되었다. 어머니께 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삼촌의 지인을 통해서 성악 선생님을 만났다. 다행히 나는 단순 반복을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준히 성실하게 연습했고, 성악을 배운 지 10개월 만에 대학에 합격하였다.
졸업할 때쯤엔 노래가 하나의 음악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연습이 너무 잘되어서 노래가 잘 될 때에는 한없이 좋다가도, 컨디션이 안 좋아서 혹은 실력이 미숙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음악표현이나 고음이 나지 않을 때에는 음악이 나를 외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지는 기분. 음악은 나를 너무 행복하게 했다가 또다시 나를 너무 괴롭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음악과 사랑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대표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준비하고 있던 곡은 졸업 공연용으로 고른 곡밖에 없어서 동일한 곡으로 협연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고음이 잘 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다행히 공연을 잘 마쳤다. 지인들이 와서 축하해 주고 많은 꽃다발을 받았다. 대기실 뒷정리를 하고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아버지께서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셨다. 하지만 챙길 것들이 많아서 아버지께 사유를 묻지 못하였다. 집에 짐을 놔두기 위해 친한 친구와 함께 아버지 차를 함께 탔다. 붙임성 좋은 친구가
‘아버님, 지혜가 연주하는 거 보셔서 너무 좋으셨죠?’
라고 물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목멘 소리로 겨우 말씀하셨다.
“내가 더 이상 지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지...”
친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아버지께서 침울해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아빠를 달래기 위해서
“아빠가 대학까지 보내준 것도 얼마나 대단한데”
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실 뿐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셨다.
나는 우리 집 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유학을 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대학까지 졸업시켜 주신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그 후 사회에 나와서 음악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아버지가 왜 그렇게 슬퍼하셨는지 몸으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부자가 아닌데 예술을 한다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떨 때는 ‘돈이 없는데 재능이 있는 건 저주와 같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에서는 온 마을 사람들이 도와줘서 결국 빌리가 로얄 발레학교에 가게 되지만, 내 현실은 달랐다.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서 8년 동안 뮤지컬 극단, 뮤지컬 대학원, 각종 아르바이트, 단역 배우, 팝페라 객원가수, 입시 학원 선생님을 하면서, 최대한 음악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번 아웃이 와서 부산으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고, 이후 5년 동안 아무런 시도를 하지 못했다. 그저 사는데 필요한 돈만 벌고 꿈은 포기하고 살았다.
일상을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내가 만일 나무라면 아무것에도 쓰이지 않아서 그냥 썩어 없어질 바에는 차라리 다 태워져서 재가 되고 싶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자 말자 내 마음이 강하게 요동쳤고 ‘내 인생이 아직 쓰이지도 못하고 썩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절박감까지 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기 싫다. 십 년 뒤도 내가 이 모습이라면?’ 그건 너무 끔찍할 것 같았다. 이렇게 살다 죽기보다는 차라리 다 타서 재가 되더라도 뭔가 다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긴 슬럼프를 딛고 다시 새 출발 하기로 하였다.
나는 앞으로 ‘결혼이나 해라’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다’ ‘헛된 꿈은 꾸지 마라’ 등 주변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남이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노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노래로 화려한 꽃을 피울 때까지 버틸 것이다. 영화 속 빌리가 하늘을 날아오르듯 춤을 추는 것처럼, 나도 언젠가 하늘을 날아오르듯 노래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는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