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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 Sep 03. 2023

구황작물 3종 세트

신속한 대령

8살 아이가 먹고 싶은 간식이...




어젯밤 잠잘 준비를 하던 중에 문득, 첫째 아이가 방을 나가더니 수첩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저것은 노란 수첩!






얼마 전부터 남편과 의논하여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에 대해 정한 규칙이 있다. 가고 싶은 곳,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글로 쓰게 하는 것.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아이들이 내가 무엇을, 왜 원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기 위함이다. 그냥 문득 떠올라서 내뱉은 말에도 아빠 엄마가 빠르게 응대해 주는 것에 아이들이 너무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예쁜 곳 하나 없는 귀한 아이들을 현명하게 키우고자 노력하지만, 아무래도 웬만한 모든 것에 오케이! 인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부모가 들어줄 때 들어주더라도 아이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연필을 들고 종이에 쓰는 수고를 기꺼이 할 만큼 꼭 원하는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해보기를 바랐다.

둘째,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이나마 경험해보게 하고 싶다. 첫 번째 이유에 덧붙여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하기 시작할만한 시기라고 여겨졌다. 돈을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경제 교육 또한 차차 이루어지겠으나 그에 앞서 (작지만) 내 노력에 대한 결과를 얻어봄으로써 성취의 뿌듯함을 느껴보길 바랐다. 이는 아이의 자존감 형성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데에 부부의 의견이 일치했다.

셋째, 일상생활에서의 풍부한 글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저절로 아이에게 내가 가고 싶은 곳과 그 이유, 내가 갖고 싶은 것과 그 이유, 내가 먹고 싶은 것과 그 이유를 써보게 할 수 있다니!', 최고! 아이 입장에서는 '쓰기만 하면 갈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다니!', 최고! 인 것이다. '보상이 직결되는 꿀맛 글쓰기'를 통해 실랑이 없이 아이들이 글쓰기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위와 같은 생각으로 현서, 윤서에게 "앞으로는 수첩에 너희가 하고 싶은 것을 써보자. 그러면 아빠 엄마랑 같이 의논해서 우리 가족의 일정을 정하는 거야." 설명하며 그림 그리던 수첩에 내가 기본 틀을 써 주었다. 여덟 살이 된 현서는 우선 글자로 쓰고 이유는 말로 하기, 일곱 살 윤서는 그림 그리기, 언니의 도움받아 글씨 쓰기가 목표였다.


저녁 먹으며 지나가는 말로 "내일은 옥수수 먹고 싶다. 감자 소금에 찍어 먹으면 맛있는데..." 했던 현서가 잠들기 전에 다시 생각났었나 보다. 뭐 하나 싶었는데 식탁 위에 곱게 펼쳐 놓은 수첩 속 삐뚤빼뚤 글씨에 뿅, 반한 아빠 엄마. 무조건 대령이다!


다음 날 마트에 가서 감자, 고구마 부리나케 사 오고, 냉동실에 얼려둔 옥수수도 꺼냈다. 열심히 삶고, 굽고, 덥혀서 완성한 3종 세트. 그나저나 여덟 살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이 감자, 고구마, 옥수수라니...


덕분에 온 가족이 맛있게 잘 먹었다.

앞으로도 문득문득 펼쳐질 노란 수첩 속 이야기가 기대된다. 은근슬쩍 엄마가 먹고 싶은 메뉴도 적어달라고 해야지.


짜쟌! 먹음직스러운 구황작물 3종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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