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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Mar 15. 2016

세이셸 가는 길 (1)

PLEASE GIVE ME A REFUND!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수를 통해 배운다. 셀프 웨딩 촬영과 셀프 인테리어를 하고 나서 그 배움에 드는 비용을 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세이셸 여행을 준비하면서 진정한 배움에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 건지, 정말 지불할 가치가 있는 건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수업료가 생각보다 비쌌기 때문이다.


세이셸은 아주 먼 나라다. 아프리카 오른쪽 바다에 떠 있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지금껏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 거리의 탓이 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여행지들에 비해 정보가 많지 않다.


사람들이 전문가를 찾는 것은 '정보' 때문이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전문가의 도움 없이 무언가를 하겠다는 시도는 스스로 모든 정보를 찾아야 한다는,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일단 세이셸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쩌면 한국어로 쓰인 거의 모든 세이셸 관련 블로그에 방문해 본 것 같다.


세이셸에 다녀온 친구들과 연락이 되었다. 한 친구는 평생 여행을 다니는 친구이고, 또 한 친구는 신혼여행으로 1년 간 세계여행을 떠나 있는 친구다. 이 정도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만 가는 곳인가 보다. 그들의 증언은 우리가 신혼여행지를 정말 잘 선택했다는 뿌듯함을 선사했다.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제일 큰 섬인 마헤(Mahe) 섬뿐 아니라 그 옆의 라디그(La Digue) 에도 꼭 가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서점에서 세이셸로 검색되는 책은 단 한 권뿐이었다. 이 책은 주한 세이셸 공화국 명예총영사를 맡고 계신 분이 지은 책으로, 세이셸에 대한 정보다운 정보를 정리해 둔 유일한 자료였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Seychelles> - 정동창 , 김빛남 지음 | 에디터 | 2013년 04월 25일 출간


세이셸관광청이 가까운 종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찾아간 곳은 의외로 가정집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자그마한 오피스텔로, 관광청이자 여행사였다. 퇴근 후 늦게 찾아가서인지 아니면 늘 그런지, 우리 부부가 유일한 방문자였다. 여직원 한 분만 남아 우리를 친절하게 반겼다.


"세이셸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는 정말 그곳에서 살기 위해 계속 방법을 찾고 있지요, 이렇게 일 하면서 준비 중이에요."


긴 대화를 나눴다. 이 날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아직 출발도 하기 전인데, 나도 세이셸에서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삼십 대의 어느 날부터인가 여생을 꼭 한국에서 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다. 지금까지는 태어나면서 정해진 환경 속에서 살았으니 남은 생애는 내가 선택한 곳에서 어쩌면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우주의 다른 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서울이 아닌 지구 상의 다른 곳에서도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만일 세이셸이 그곳이라면, 이번 여행은 신혼여행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국내 유일의 세이셸 관련 도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세이셸> & 세이셸 관광청에서 얻은 마헤섬 지도


후덜덜한 패키지 견적서를 포함하여 우리가 가게 될 주(主) 섬 지도, 여행가방에 달 수 있는 네임텍, 현지에서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 안내서 등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았다. 우리가 가게 될 11월은 세이셸의 물이 가장 맑을 시기라고 했다.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가장 큰 수확은 세이셸에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정에 따라 두 개의 항공사 중 선택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는 에티하드 항공사(Etihad Airways)가 나아 보였다. 일 년에 단 한번 에티하드 특가가 나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 타이밍을 잡는다면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세이셸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몇 주가 지났을 때, "드디어 특가가 떴어요!"라는 톡 메시지를 받았다.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인지 모른다. 이 날을 위해 항공사 홈페이지를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며 예약 연습까지 했다. 관광청에서 얻은 정보를 기초로 한국 출발 티켓보다 홍콩 출발 티켓의 할인율이 훨씬 높다는 것도 확인했다. 에티하드 항공사에서 홍콩-아부다비(경유)-세이셸 티켓을 구입한 후에 한국에서 자주 있는 한국-홍콩 간 티켓을 역시 특가로 구매하면 한 번에 한국-세이셸 티켓을 끊는 것보다 1인 당 30만 원 이상을 아낄 수 있었다. 특가에 눈이 멀어버린 바로 그 순간이다.


이것이 가능한 지 알아보기 위해서 항공 티켓을 구입하기 전에 여러 항공사에 몇 번 씩이나 전화를 걸어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원래 연결되어 있는 항공권이라면 당연히 비행 스케줄도 연동 조정되지만, 승객이 임의로 연결한 항공권이라면 최소 환승 시간이 확보되는지, 목적지까지 짐을 옮겨 주는지 일일이 확인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항공사와 통화해서 정확한 답변을 듣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특히 외항사의 경우는 더 그렇다. 예약 전에 확인을 마친 들, 첫 번째 비행기가 몇 시간씩 연착되어 그다음 비행기를 놓치더라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다. '설마 비행기를 놓치기야 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특가 티켓 예약을 진행했다.


특가 예약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환불 불가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금액적 특권을 받는 대신 그 어느 변경도, 그 누구에게 변명도 할 수 없다. '설마 비행기를 놓치겠어?'라는 마음과 비슷하게 '설마 변경할 일이 생기겠어?'라는 자세로 임하는 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타나지 않았던 '왕창 세일 요금'이 화면 제일 왼쪽에 나타났다. 아찔한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배었다.


출입국 날짜 확인

출발/도착 도시 확인

탑승 인원 확인


여기까지 잘 했다. 과감하게 이어간다.


수화물 추가

좌석 선택

그리고 카드 결제


수화물 추가 단계는 넘어가기로 한다. 우리 짐이 그렇게 많지도 않을 것이고, 수화물 몇 kg을 추가할 때마다 추가금이 붙는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니, 좌석을 선택할 수 있는 화면이 뜬다.


에티하드 항공사 엑스트라 레그룸 (비상구 열) 좌석 선택 시 안내되는 안전 요건


이미 여러 좌석이 선택되어 있었다. 신랑은 다리도 길고 몸도 크니까 장거리 비행을 하려면 최대한 넓은 공간이 있는 자리가 좋을 것 같다. 이 티켓은 홍콩을 출발해서 아부다비를 경유하여 세이셸에 도착하는 항공권이다. 즉, 홍콩-아부다비 구간과 아부다비-세이셸 구간의 자리를 왕복으로 모두 선택하면 총 네 번의 좌석 선택을 하는 것이다. 다행히 비상구 좌석이 몇 개씩은 남아 있어서 모든 구간을 비상구 자리로 선택할 수 있었다. 좌석 선택을 마치자 비상구 좌석에 앉는 승객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안내문이 나왔고, 그 역할에 동의하는 의미에서 "예, 동의합니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 "예"로 인해 발목이 잡혔다.


선택한 내용을 확인하고 카드 결제하니 모든 예약이 완료되기는 했는데, 엇, 잠깐...


완료 후 발급된 영수증에 홍콩달러로 적힌 금액을 확인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환율을 아무리 높여 계산해봐도 특가로 올라와 있던 처음의 가격보다 총 40만 원 정도가 더 비쌌다. 적은 돈이 아니다. 이유를 찾지 못하다가, 이메일로 온 대금 결제 내역서를 보고 내가 좌석을 한 번 선택할 때마다 약 5만 원씩 추가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명의 왕복 티켓이라 여덟 번의 좌석 선택으로 총 40만 원 정도가 든 것이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에티하드 한국지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나는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논리 같은 것을 필요치 않는 원칙주의자였다. 이미 내 돈을 다 받아버려 아쉬울 것 없는 '갑 측'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구구절절했다. 특가로 예약하려고 시도 중이었는데 시스템을 그 모양으로 구축해 놓아서 자리 선택할 때마다 추가금이 드는지 알 수도 없게 만들어 두었으니 이렇게 돈을 내는 건 억울하다 (구구절절) 수화물은 무게 당 추가금액을 적어두었으면서, 자리 선택에는 추가 금액을 직관적으로 적어두지 않아서 고객의 혼란을 유도하느냐 (구구절절) 내가 원하는 서비스라면 마땅히 돈을 내고라도 이용하겠지만, 그 정도까지 원했던 건 아니었다. (구구절절...)


누가 뭐래도 환불 불가


항공사는 누가 뭐래도 환불 불가 정책상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으니, 본사로 직접 메일을 보내보라면서도 이런 식으로 환불에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고 남 일인 듯 안내를 했다. 에티하드 본사에 다섯 가지 논거를 나열하며 당신들이 엑스트라 레그룸에 매긴 비용은 부당하니 나에게 돌려달라고 이메일로 항의했다. 그들은 내가 눌렀던 "예, 동의합니다." 가 그 비용 부과에 동의한 것이므로 환불은 해줄 수 없다며 즐거운 여행되시라고 답을 했다. 억울함이 배가 되어 절대 즐거울 수 없었다. 내가 "예" 했던 것은 비상구 좌석에 앉아서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비상상황에 다른 승객들의 안전을 위한 역할을 하겠다는 데에 동의한 것인데 말이다. 돈을 더 내야 했다면 당연히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좌석을 선택할 때마다 화면 구석의 코딱지만 한 운임 내역에 비용이 더해지긴 했나 보다. 스크롤까지 내려 확인해야 하는 곳에 있는 정보를 어떻게 보라고 만들어 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항의할 창구도 없었다.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구태의연한 표현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침착하게 정당한 값어치를 치르겠다는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돈을 강도에게 빼앗기듯 내야 하는 세상이다. 인터넷으로 편하게 장사할 수 있는 환경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말이 전혀 안 통한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내가 나중에 사장님이 되더라도 이렇게 똑같은 방침을 세워 방어하게 될까? 그러지 말아야지, 인간미를 잃지 말아야지.


항공권을 예약한 것이 4월 초였으니, 그 후로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에티하드 두고 보자...'는 마음을 안고서 결혼과 여행을 준비할 뿐이었다. 세이셸 가는 길이 항공사와의 다툼으로 우울하게 얼룩졌다. 막상 비행기에 타 보니 비상구 좌석은 앞에 앉은 승무원 때문에 더 불편했고, 다른 좌석에 앉은 승객들은 텅텅 빈 좌석들로 옮겨가 심지어 누워서 여행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환불받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집 도배를 하시던 분이 부셔먹은 의자에 대해서 항의했을 때, 최대한 빨리 똑같은 의자를 사 오겠다던 분이 작업비를 다 받자마자 입을 싹 닫았던 것처럼 말이다. 의자를 보상받은 후에 작업비를 냈어야 한다. 거래를 할 때 돈은 제일 나중에 주는 거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인간미를 기대하기보다, 어쩌면 순진하게 기대했다가 억울하게 눈먼 돈을 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을 이렇게 배웠다. 수업료로 HKD 2,714(40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 게다가 이런 인생 수업료는 누가 뭐래도 환불 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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