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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ya Mar 07. 2018

아버지

  사람은 누구나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 유구한 세월만큼의 역사는 켜켜이 쌓이고 쌓여 먼지를 덮어쓴 비슷한 몇 권의 책으로 엮일 수 있는 평범한 것들로 보인다. 하지만 그 책을 펼쳐본 순간 희미한 글자들은 낱낱이 튀어나와 생생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나는 그 낡고 빛바랜 책들 중에서 내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 보고자 한다. 그들의 삶이, 그 평범하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그 삶들이 얼마나 소중한 그물의 한 코를 담당하고 있으며, 우리 자손들의 삶에 얼마나 큰 몫을 해 왔고, 하고 있는지를 알려 드리고 싶어서다.


  얼마 전 친정집 지하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카세트 안에 들어있던 우리 아버지의 녹음테이프를 듣게 되었다. 40여 년 전 우리 남매가 부모님을 떠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 이 녹음을 하신 것 같았다.

  우리 부모 세대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나의 아버지 어머니도 파란만장 화려한 인생을 사신 분들이다. 굵직한 것만 말해도 일제 강점기, 전쟁 그리고 건국의 혼란기이며 거기다 사소한 우리네 살아가는 신산함은 어떠했겠는가.


  아버지는 잘 살진 못했어도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닌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실권을 장자에게 넘겼기에 막내아들의 고등학교 진학도 장자의 눈치를 봐야 했다. 결국 아버지는 시집간 누나의 집에 얹혀살며 혼자 힘으로 학업을 계속해야 했다. 수업이 끝나면 연필도 팔러 다니고 주말이면 역에서 짐꾼 노릇도 하고 목돈이 필요할 때면 피도 팔았다 한다. 그 당시 가장 큰 소원은 배가 터지게 한번 먹어보는 것이었고 누가 국수를 사 준다기에 8그릇을 먹고 ‘이제 앞이 보인다 ‘고 했다는 에피소드를 지금도 자주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그렇게 피나는 노력으로 학교를 마치고, 교사 채용 시험을 2등으로 통과했다. 교육감이 직접 불러서 어디든 원하는 곳에 발령을 내주겠다는데도 부모 곁에 가야 된다는 생각에 대도시를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에 반해 엄마는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았다. 밑으로 두 명의 동생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큰외삼촌이 태어날 때까지 금지옥엽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하지만 엄마 나이 열아홉에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학교 선생에게 시집간 후로 겪어보지 못한 배고픔도 겪었고, 군에 갔다 하반신 마비가 되어 돌아온 남편을 기어코 정상으로 회복시킬 정도로 질긴 생활력도 있었다. 어린아이 둘을 옆에 끼고 농사도 지었고 장사도 했었다 한다. 아침이면 남편과 어린 아들 밥상을 차려놓고 젖먹이를 업고 ‘강냉이 사이소’ 하며 골목을 누빌 때에 처음엔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 한마디 없이 마냥 걸어 다니기만 했었다. 어쩌다 친정동네 사람들이라도 만나 네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느냐는 말을 들을 때면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낭만이 있었고 유머가 풍부하여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맏딸이었기에 엄마의 하소연을 자주 들어야 했고 아버지의 여자를 본 적도 있었기에 나는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참 많이 미워했었다. 물론 그것이 용납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감성적인 아버지가 그 정도의 피난처도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 긴 생을 살아 내었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이었을까 싶다. 그때는 중학교도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4분기로 나누어 내야 하는 학비가 있었고 줄줄이 있는 아이들이다 보니 그것도 목돈이 되었다. 오빠와 나의 학비에 교복 비용까지 추가되어 돈을 빌려와야 했고, 몇 달 뒤 상여금이 나오면 갚을 수 있다는 의논을 두 분이서하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오빠가 그럼 다음 학비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한참을 가만히 계시던 아버지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했다.

언제나 돈이 없어 빌려와야 하는 것도 싫은데, 계획도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가 그때는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어 보였다. 

    

잘 들어라 00야,

내가 너희들 줄라고 새끼줄로 멜빵을 메고 기차역에 내려 그 무거운 짐을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올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나?

두 사람이 붙어서 겨우 내 등에 짐을 지어 주면서 어떻게 이 무거운 걸 지고 갈 수 있냐고 해도 나는 정말이지 힘이 하나도 안 들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니까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부모가 있으니까. 내가 이 아비가 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는 말이다.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해줄 수 있는 너희들만 있으면 된다.

아버지는 어느 날인가,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이렇게 당신의 지나온 삶들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여전히 힘들었을 그 당시의 심정을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간간이 울먹이기도 하고 설움에 겨워 마음을 추스르느라 빈 테이프만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부모님은 우리 다섯을 키워 내셨다.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더 받지 못했음에 원망했었던 그들이었는데.

그 애비는 어느덧 팔십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도 여전히 아비로 살아가고파 월 20만 원짜리 시니어 일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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