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그레이스>를 보고
"생각한 것으로 죄를 받아야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감옥에 있어야겠네요"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는 의사 조던의 질문에 그레이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레이스의 가족들은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이주한다. 선상에서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술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아버지에게 갖은 학대를 당한 그녀는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어느 집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메리 휘트니라는 하녀를 만나 한 방을 쓰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메리는 주인집 아들의 아이를 갖게 되고 결국 버려진 그녀는 아이를 지우다 목숨까지 잃게 된다.
다른 집으로 옮겨 간 그레이스는 같은 하녀의 신분으로 주인집 남자의 정부로 살아가는 여자 낸시와 주인인 키니어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동안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며 도와 온 목사와 후원 단체는 조던 사이먼이라는 정신과 의사를 고용하여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한다.
과연 그녀가 남자 하인인 제임스 맥더못을 사주하여 살인을 하도록 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주장대로 단지 누명을 쓰고 있을 뿐인지를 밝혀야 하는 조던은 그녀의 해맑고 조리 정연한 대답에 그녀를 믿게 되고 그녀에게 점점 빠져드는 자신을 보게 된다.
여성을 한낮 성적 대상이나 부속물로 취급하던 남성 위주의 사회, 게다가 신분제도까지 남아 있던 시대에 가진 것 없는 여자 아이가 혼자서 삶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밖에 없었을 것이다.
순응하며 살거나 교묘히 이용하는 것.
그래 세상은,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 그레이스.
해맑은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여자.
내가 그레이스의 나이였을 때는 1970년대 중반이었다. 산업화되어가는 과정이라 대도시를 중심으로 의식의 변화가 약간씩 일어나고 있었지만 시골과 가정에서는 여전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여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하늘같이 믿으며 조신하게 지내다 부모가 정해주는 혼처에 시집가서 남편 말 잘 따르면서 아들 낳고 살림 잘하는 것이 큰 미덕이었다.
그렇게 우리 딸들은 아들들에게 교육과 모든 기회를 양보해야 했으며 조리 있게 반박을 할 때면 드센 여자라 낙인찍히고 그런 여자들은 맞아야 한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그레이스가 살았던 시대에서 2백 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 흘러간 지금 우리 여자들의 삶에 달라진 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여자라서 할 수 없는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에서 보이는 것처럼 곳곳에 아직도 많은 차별들이 존재한다. 여전히 여자의 가치는 남편과 아이들의 세속적 성공으로 값이 매겨진다. 정말 우스운 것은 그러한 평가를 기대하며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레이스가 진짜 살인을 사주했는지 아니면 단지 누명을 쓴 인물인지 극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무고하지만은 않다는 단서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시청자가 어떠한 결론을 내리던 그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선택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지는 않겠다는 약자의 몸부림은 길을 막아놓으면 어떻게든 뚫어 나가는 물꼬처럼, 갈 길을 찾아 가게 마련이다.
6편의 극을 다 볼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원작의 훌륭한 짜임새가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긴 여운이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