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에세이3] 자유로부터의 도피2 -에리히 프롬.

5점 만점 4.9

by 노트북

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이번 두 번째 후기에서는 앞에서 공유드렸던 1~3장 까지를 각 장별로 요약을 해보았고,

추가로

제4장 근대인의 관점에서 본 자유의 두 측면.

까지 이어서 요약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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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자유 - 하나의 심리적 문제인가?


이 장에서는 인간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의 이면(고독, 고립, 불안, 복종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하고,

이 불안이 일어나게 된 원인( 이 책의 목적)에 대해 화두를 던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아무 장이나 딱 한 장만 읽어도 이 책의 목적을 모두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양질의 내용이 가득하기도 하고, 또 비슷한 내용이 계속 반복되기도 합니다. ^^..! (그런데 아무리 반복돼도 어려워서 싫증이 나진 않네요..ㅎㅎ 오히려 반복해서 읽어야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




2장. 개인의 출현과 자유의 다의성.


이 장에서는 르네상스부터 완전한 개인이 출현한 배경과 인간에게 자유의 의미(인간 존재와 자유는 처음부터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역시 이번 장에서도 자유를 얻으면 생기는 고립에 대한 불안과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그 순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는데, 나중에 아들이 커서 저희 부부의 말에 완전히 반기를 들더라도, 그것은 아들의 진정한 '이성'이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뜻으로 생각해야겠습니다.


권위의 명령에 거역하고 죄를 짓는 것은 긍정적인 인간적 측면에서 보면 최초의 자유 행동. 즉 최초의 '인간적인' 행동이다.


자유 행동으로 신의 명령에 거역한 불복종 행위는 '이성'의 시작이다.


지난번 후기에서 쓸까 말까 하다가 못 쓴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상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업맘이 되고 보니, 그렇게 그 시간이 행복하고 충만하게 느껴졌었는데요,,!

이 책을 읽으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 고립/고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사랑이나 생산적인 일 같은 자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이를 돌보며 원 없이 사랑하고 있었고, 또 깊은 밤에는 주로 당시에는 매일 글을 썼기 때문에 무언가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직장인들도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고 동기부여를 받고 성취를 느끼고 행복해합니다.

저는 그런 기쁨이 전업맘의 생활보다 훨씬 클 줄 알았고, 처음에는 분명 엄마기 때문에 저의 반쪽을 단념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활은 정말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경제 활동으로서의 일을 할 때 보다, 2세를 키우고 창작(?) 활동을 한다는 것이 한 단계 더 수준 높은 일이며 더 가치 있고 인생을 가장 낭비 없이 사는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일이 아니어도 이렇게 정신적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일만 하고 겪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아니, 제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느끼는 부분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을 할 때는 (경제 활동으로의)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만족스럽고 아무래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막상 그 경제적 일을 그만두니, 이번에는 (회사)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짠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아직 회사 근처에 살기 때문에 아침 일찍 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회사 사원증을 매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대부분은 피곤에 쩔고 어두운 표정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니 제가 본 분들은 거의 그런 표정으로 출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삶이 가장 나은 삶이라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겠지..! 절대 이 삶의 비밀을 모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아빠에 이어 엄마까지 버는 집의 아이들이 훨씬 풍족할 거라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막상 일에 치여.. 함께 해주는 시간도 적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누리지도 못하고 돈은 쌓아만 두다가 가끔 해외여행에서 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침부터 저녁 퇴근 때까지 어린이집, 유치원 안에서 계속 기다리는 아이들이 훨씬 짠합니다.


이제는 저도 외벌이라 수입은 딱 반으로 줄었지만, 낮에 아들이 큰걸 안 해도.. 엄마와 도서관 가고, 도시락 싸서 등산 가고, 미술관/전시회도 가고,, 여기저기 필요하다는 수업 스케줄 짜서 엄마랑 함께 다니고 하는 삶이 훨씬 값지게 느껴집니다. 물론.. 아들이 물려받을 돈은 적은 게 아니라, 저희가 노년에 쓰면 거의 없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게 다가 아니고 각각의 필요한 시기에 내면을 채우면서 사는 것도 재산을 축적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쪽 삶 밖에 모를 때 생각이 어찌 보면 참 철없었다는 생각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만족으로 삶을 살고 있겠구나를 느꼈던 계기를 말씀드리는 거네요,,!

어느 삶이든 포기하는 대신에 값지게 얻는 것이 있는 건 명백하니까요,!

각자는 자신의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이 장에서는 공동체의 삶에서 개인으로서의 자유의 개념은 크지 않았지만, 공동체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하던 중세에서 자본주의로의 과도기를 겪으며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개인의 출몰에 대해서 한번 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몇 줄로 접했던 그 루터와 칼뱅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이렇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내용이 너무 깊고 방대하지만 정말 간단히 이야기하면, 루터와 칼뱅은 그 시절 거대 자본 앞에 무력함과 불안을 느끼는 중산층(루터는 농민에게 까지)에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느끼는 그 감정에 정확히 공감하며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신 앞에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무력화시켜 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자기 비하와 인간적 자존심의 파괴가 그 사상 전체의 중심을 이룬 것입니다. 이 내용이 상당히 길었는데, 읽는 내내 제가 왜 다른 사람의 종교로서는 인정하나, 저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알랭드 보통도 현대인의 불안의 해결방법 중 하나로 종교를 제시했을 만큼 그들이 누리는 영적 평화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하지도 않았던 기독교를 지인을 따라가서 알게 되었는데, 왜 자신의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죄인이라 여기고 오직 신만을 위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지극히 평범한 장로교회를 권유에 못 이겨 두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위기가 꼭 사람의 영혼을 죽이고 자연스럽게 군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책에서 거의 그렇게 묘사합니다. 아마도 저나 저자와 같이 깊이 있는 종교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교리를 그렇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 장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어떤 사상, 예술, 문학이든 그 시대의 공감을 받는 것이 한 획을 긋는다는 것입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이상의 [날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광수의 [무정][유정][흙] 등은 모두 2차 세계 대전 전후를 살았고, 그 시절과 그 이후의 조국의 참담한 상황들을 그린 작품 들입니다.

이 작품들에서 공통적인 감정을 하나 뽑으라면 개인의 무력함입니다.

왜 그 시절 젊은이들은 열광했는데, 특히 이상과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들은 요즘의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경악스러울 만큼 무기력합니다. 우리나라, 일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럽 역시 그 시절 소설들에서 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게 그 시대상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잘 공감받기 힘들지만, 그 시절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모두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의 그 비참한 상황을 한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 줄 수 없는 비극적인 참담함을 거의 모두가 느꼈던 기본 정서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기만 해도 동정이 가고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주인공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하고픈 그 감정이 그 시절의 대표적인 소설들로 만들었을 거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요즘의 이 거대 인플레를 동반한 자본시장에서 개인들의 부에 대한 열망, 불안을 공략한 유튜버(크리에이터)들이 대성공을 거둔 것들과 비슷한 예인 것 같습니다.

루터와 칼뱅 역시 그 시절 거대 자본들이 등장하며 무력해지는 개인들과 빈곤층의 그 불안함, 억울함을 대변하며 해법까지 제시해 하나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자본주의에서만 산 우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가 만든 경주마 같은 인간상이고 그 이전에는 노예가 아니고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지난주 후기에서도 살짝 언급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저 조차 몰랐던.. 저의 그런 자본주의에 잘 적응하려는 성향들이 타고난 것인 줄 알았는데,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자본주의에 찌든 사상을 그대로 교육받고 흡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에 경제활동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런 생활이 너무나 가치 있고 의미 있다 느껴집니다. 중세 시절의 귀족(자유민)은 '보다 고상한' 일에 몰두하며 살아갔다고 합니다. 자신을 갈고닦는 일에 열중한 것이지요. 저 역시 지금은 그것이 경제 활동 보다도 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귀족들이 그렇게 살아서 몰락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귀족이.. 훨씬 수가 많았던 노예와 소작농들의 노동력에 자신의 노동력을 합치지 않은 그 간극을 채우지 못해 망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100명의 노동력에 본인의 생산력 1을 합치지 않아서 망한 것이 아니고, 인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돌보지 않아서 몰락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노예와 소작농이지만 '역지사지'가 되지 않고 관계를 돌보지 않고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일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는 지금의 제 입장에서 드는 생각을 써봤습니다.)




4장. 근대인의 관점에서 본 자유의 두 측면

이 장에서는 소극적인 자유(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무엇을 위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가지 못하면, 아예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장의 내용은 다른 장보다 내용이 더 비약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짧게 내용은.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고,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신이 되었다는 뜻이고,

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품지만, 일찍이 선조들이 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느꼈던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 심리를 탐구(5장)하고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무력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알랭드 보통의 [불안]의 어려운 버전 같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 창작활동, 능력주의(자본주의), 불확실성,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가 그 책의 소 카테고리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너무나 내용이 비슷한데, 이 책이 더 역사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좀 더 철학적, 심리적 접근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불안]을 읽고, 내용에 매력을 느낀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수순일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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