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나의 고민은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부지런한 새처럼 일찍 일어나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한다는데 나는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사흘을 넘기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자책도 따라붙었다.
게다가 나의 어머니는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고 마는 강한 기질의 소유자셨다. 어머니가 보시기에 나의 실패는 오직 정신력의 실패였다.
‘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왜 못해. 다 정신력이다.’
어머니의 반복되는 평가는 나의 자책에 기름을 부었고, 덕분에 나는 ‘의지가 약하고 게으른 사람’이라는 확고한 자아 정체성(?)을 가진 채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운동은 안 하면 그만이지만, 욕심이 나는 일, 사회가 요구하는 일까지 안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나는 홍수가 나도 출근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 살고 있었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늘 죄인이라도 된 듯 ‘의지가 약함’을 사과하고 변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존감이 높아지려야 높아질 수 없는 환경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약이라도 먹어보자는 생각에 찾아 간 한의원에서 처음으로 반전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는 타고나기를 ‘약하게’ 타고났다. 에너지를 만드는 몸통보다 에너지를 써야 하는 사지四肢가 길어서 늘 에너지가 모자랄 뿐 아니라 소화 기능까지 약해서 힘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신체 구조를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 말씀이 내게는 복음 같았다. 길에 나가서 큰 소리로 ‘저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체력이 약할 뿐이에요.’ 외치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실제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의기양양하게 그 사실을 전했다!)
덧붙여 한의사 선생님은 일하며 살 수 있는 체질이 아니니, 가능하면 마님처럼 일하지 말고 놀면서 살아야 행복하고 건강할 수 있다는 조언도 잊지 않으셨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마님 체질’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원인을 알면 바른 해결책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이후 나는 이것저것 욕심 내는 대신 ‘필요한 일’에만 에너지를 집중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 덕분에 체력의 문제를 덜 겪게 되었고, 자존감은 그만큼 높아졌다.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제대로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분간할 수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의 차이, 나와 타인의 차이, 마음 안에서도 내적인 힘과 외적인 힘을 분간할 줄 알아야 자신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을 평균으로 환원하는 근대적 인간관 아래에서 개인이 점점 불행해져 온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알고 보면 ‘인간은 모두 같다’는 생각은 매우 폭력적이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폭력이 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