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하며, 이것이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라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보는 세계가 실재가 아니며, 실은 동굴벽에 비친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동굴을 벗어나 그림자를 만드는 진짜 사물과 태양빛을 보게 된다면, 자신이 여태까지 실재라고 여겼던 그림자들이 실재 세계에 비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주장은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지만 평범한 우리로서는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단체로 동굴 밖 세계를 볼 수 있는 입구에 서 있다! 물리학과 뇌과학이 우리가 갇힌 동굴의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머물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혹은 해외로 여행을 가면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파랗게 보이던 하늘이 미국에 간다고 빨갛게 보이지는 않는다. 우주에 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멀고 낯선 곳에 가도, 우리가 보는 세계는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감각 능력에 의해 제한된다.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는 '가시광선'이 보여주는 세계뿐이다.
하지만 물리학의 발견에 의하면 세계는 우리가 보는 모습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적외선 카메라에 찍힌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다.
10년 전쯤, 공항 적외선 카메라에 어떤 사람의 방기放氣(방귀)가 찍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만약 우리가 ‘가시광선’이 아니라 ‘적외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면, 화장실 한편에 ‘방기실’이 설치됐을지도 모르겠다. 또, 사진같은 시각계를 지닌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지구인이 오징어처럼 먹물을 뿜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세계의 모습은 이렇듯이 어떤 감각 체계로 감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세계의 유일한 모습이 아니라, 세계가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가능한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우리에게 어떻게 감각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감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계가 '보이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인지과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의 뇌가 만들어 낸 이미지다. 다시 말하면, 나의 감각 체계가 창조한 내 눈에 보이는 세계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가 각자의 상상 속에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뇌는 고유한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고 창조한다. '시각'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흔히 망막에 사진처럼 이미지가 찍히고, 뇌가 그 사진을 보는 형식으로 시각이 작동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망막에 맺힌 정보는 망막을 통과하는 순간 각각의 전기 신호로 잘게 쪼개진다. 예를 들어, 빛이 입력되었다는 정보는 망막의 광수용체 중 하나인 막대세포(간상세포)에 새겨지는데, 막대세포는 오직 빛이 있느냐 없느냐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빛이 한 알갱이라도 들어오면 뇌에 이 신호를 발신한다.
반면, 원뿔 세포(원추세포)는 빛의 파장에만 관심이 있다. 원뿔 세포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각각 긴 파장, 중간 파장, 짧은 파장에 반응한다. 즉, 망막에 존재하는 광수용체들은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정보에만 반응한 후, 이 정보를 전기 신호의 형태로 뇌의 다른 부위로 전달한다. 그러니까 뇌에 주어지는 데이터는 '세계의 사진'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전기 신호들'인 셈이다. 그리고 뇌는 이 신호들을 합성하여 우리가 인지하는 '하나의 상'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외부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색깔'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실재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색'이 아니라 '광자의 운동'이다. 그런데 뇌는 그 운동의 파장을 쪼개어 각각을 다른 색으로 표시한다. 또 평면 망막에 맺힌 상을 입체로 변환하기도 한다. 망막에 맺힌 '평면‘이 우리에게는 '3D 입체'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렇게 뇌는 여러 전기 신호를 합성하여 부지런히 '우리가 보는 세계'를 만들고 있다. 뇌 안에서 일종의 동영상 편집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아마 착시 효과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눈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면 착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뇌가 전기신호를 바탕으로 정보를 재가공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착시가 발생한다. 또, 그것이 착시라는 것을 알아도 착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뇌가 편집한 세계의 일부'를 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세계를 보는 과정은 전선을 타고 들어온 전기 신호가 모니터에 재현되는 과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원리를 모방해 외부 세계를 인지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지과학의 설명을 듣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의 감각 프로그램, 즉 뇌 속의 동영상 프로그램이 누구에게나 똑같은가 하는 것이다. 만약 프로그램이 다르다면 우리는 각자의 세계 속에서 각기 다른 세계를 보며 살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흐는 앱상트(absinthe)라는 독주를 장복한 부작용으로 노란색에 더 민감했는데, 이것이 황색을 선호하게 된 이유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노란색은 실제로 그의 눈에 비친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과 달리, 우리는 사실 스스로 창조한 각자의 세계 속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험에 의하면, 이 사실만 명심해도 일상에서 겪는 많은 갈등이 해소되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누구의 말이 옳고,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를 두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갈등을 빚으며 사는지…. 하지만 '감각의 부정확성'은 인간의 감각 체계가 지닌 구조적 한계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러니 '내가 본 것, 내 세상'을 고집하느라 무의미한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지 못했는가'이다. '내 경험과 감각'을 과신하는 습관만 줄여도, 삶이 훨씬 평화로워질 것이다.
[1] 글의 제목은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저서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2] 감각에 대해 더 공부하실 분에게는 '새로운 무의식(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저, 까치)'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