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의 자리는 하나다.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코치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물었다. 아이는 대답을 망설였다. "여긴 너랑 나밖에 없어. 니가 한 얘기를 코치에게 전하지도 않아"라고 말했다. 그제야 아이가 대답했다. "죽이고 싶어요"라고.
교무실 위치가 바뀐 뒤 더 이상 나에게까지 들려오진 않지만 작년 이맘때 운동장이 아닌 교무실에 있는 나까지 심장 철렁이게 만들었던 그 욕들. 운동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함과 욕설은 잔디를 박차고 매섭게 4층까지 뚫고 올라왔다. 그건 분노일까, 어떤 방법으로든 학생을 잘 가르치고 말겠다는 코치와 감독의 열정일까. 물론 이 광경은 부모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어도 변함이 없다.
'예체능은 군기가 세대, 욕이나 체벌은 아무것도 아니래'라는 말을 그동안 숱하게 들었다. 어쩌다 보니 운동부가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 중이다. 축구부 안에서 폭력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된 아이들은 교실에 와 친구들에게 그 스트레스를 푼다. 자신이 받은 방식대로 말이다. 물론 모든 운동부 학생들이 그러는 건 아니다(매년 학년 당 한두 명 정도).
코치의 말투와 표정을 따라 하며 동생을 체벌하는 준호를 보며 간담이 서늘했다. 만년 4등이던 아이는 아래는 체벌로, 위는 전에 없던 자신의 의지로 한 칸 한 칸 쌓아 올려 결국엔 1등이라는 성을 짓는다.
영화의 결말이 아쉬웠다. 무슨 이야기를 갖다 붙여도 어쨌든 결국엔 1등이다. 닦달하는 엄마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의지로 이뤄낸 1등이라 포장해도, 어쨌든 결국엔 1등이다. 사실 자신의 의지로 열심히 노력해 1등을 하는 것 자체가 현실에서는 엄청난 행운이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1등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엄청난 자의와 그에 의한 노력을 수반하지만, 그것들을 쏟아부은 모든 이들이 1등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리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차라리 설령 1등이 아니어도, 수영의 재미를 스스로 느끼고 등수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그리는 결말이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애초에 내가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 기대했던 것도 이와 유사하다. 인권위에서 제작한 영화라면 그런 방향이 좀 더 옳지 않았을까 싶다.
1등이라는 달디 단 꿀을 맛본 뒤 마대자루를 바라보는 준호를 보며 나중에 준호가 어떤 코치가 될지 상상했다. 준호는 자신이 받은 체벌의 부당함을 인지하고, 자신의 제자에게 손끝도 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준호의 1등에는 체벌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체벌에 이유를 붙이는 순간 그 체벌은 정당화된다. 다만 '정당화된 체벌'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할 수 있는지는 비판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체벌이 과연, 내가 당했으니 너도 당해야 한다는 그런 못된 심보만으로 대물림되는 것일까. 물론 이 역시 무시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체벌에 노출된 성과를 이룬 사람들이, 체벌의 효과를 정당화해서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 아닐까 싶다. 정당화된 체벌은 없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체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체벌 없이도 충분히 상대에 대한 열과 성을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여러모로 이 영화가 아쉽다. 좋은 부분이 분명 많았는데 결말이 아쉬우니 그 아쉬움이 배가 된다. 더불어 자기 자식을 망치는 엄마의 모습을, (물론 충분히 현실적이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제시하니 숨이 막혔다. 다 알고 있어서 오히려 스크린에서까지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모습들 말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1등이 아니어도 행복할 수 있길 바란다. 그 자리가 어디든 자신의 자리에서 그 누가 주입한 것도 아닌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과 성취감으로 행복할 수 있길 바란다. 물론 이 말은 나에게도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