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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UM Jun 14. 2018

<우리도 사랑일까>,
그것도 사랑이야.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이듯.

 그러니까 정말 1분 1초가 아까울 정도로 그득그득하던 것들에도 '균열'이란 작용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균열이 만들어 낸 틈의 간격은 처음엔 하루로, 하루는 일주일로, 일주일은 10일로, 그 10일은 다시 한 달이 되어 마치 언제 그득했냐는 듯 일상으로 스며든다.


권태로움, 그 지난한 과정.


 영화 속 마고의 권태롭고 무기력한 표정의 대상이 내가 당연스레 연상한 인물이 아니었단 걸 깨달을 때의 씁쓸함과 쓸쓸함은 이루 설명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그 권태로움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처음과 끝 어디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반복적인 것일 테다.


 사람은 원래 제한된 상황에 놓이면 가지지 못하는 것에 더 애타고, 애달프고, 애틋해지기 마련이다. 사실 막상 손에 쥐고 보면 별 거 없는데도 말이다. 현재와 비교했을 때 오는 신선함과 이번에는 특별할 것이란 기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나의 것'을 방해하는 모든 제반 요소들이 합쳐지면 그 감정의 크기는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밤잠이 유난히 많은 내가 나의 새벽을 건네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분명 있었다. 그로 인해 내가 감수해야 할 피로보다 같이 하는 그 시간이 훨씬 값졌던 사람들. 없으면 어떡하지, 이 모든 것은 누구와 나누지, 이런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던 누구는 길고 누구는 찰나였던 그 순간들은 결국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눈도 못 마주치겠던 설렘이 기분 좋은 긴장으로 바뀌고, 그것이 편안함이 되고, 익숙함이 되며, 나아가 싫증과 권태로 빠질 때.


 기계적인 고백과 대화가 없어 못 견디겠는 식사는 당연히, 대화가 없어도 수줍은 순간에 비하면 하찮을 수밖에 없다. 행동으로 옮길 수 없어 말로만 사랑을 속삭여야 하는 상대는 당연히, 큰 용기를 내 유혹해야 하는 남편보다 흥분될 수밖에 없다.



 아주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널 웃기려고 매일매일 장난을 쳤어. 우리는 시시콜콜 다 알아서 서로의 근황을 물을 필요는 없지만 가끔씩은 밖에서 아주 맛있는 걸 같이 먹고 싶었어, 비록 그 테이블에 대화는 없어도 말이야. 나를 유혹하는데 큰 용기를 내야 한다는 너에게 때로는 서운했지만 결국 방식의 차이일 뿐 나도 똑같이 너를 사랑한 거야, 비록 처음의 설렘은 없지만 말이야.



 마고는 분명 또 권태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거다. 어쩌면 전 남편에게 돌아갈 수도 있겠지. 미안해. 내가 착각했어. 잠시 흔들렸어. 그게 사랑인 줄 알고, 더 소중한 걸 놓쳤었다고 하면서.


 언제부턴가 감정에 너무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일렁이는 순간적인 동요에도, 어차피 시간과 함께 지나갈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넘어가는 장들이 켜켜이 쌓였다. 어쩌면 그 순간의 동요가 모든 걸 바꿀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수영장의 할머니들은 이미 알았겠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짓는 미묘한 웃음과, 변한 수영장 물 색에 깔깔거리는 것이 얼마나 치기 어린 것인지.


조명과 노래가 만들어내는 '즐거움'이란 환상


 처음엔 분명 깔깔 웃으며 탔는데 조명이 켜지고 노래가 꺼지자 모든 것이 어색해졌다. 내가 언제 즐거웠나 싶은, 마치 다른 세상에 놓인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마고의 모습이 사랑의 과정과 끝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비 오는 날 이런 영화를 봐서 가뜩이나 슬픈 영화가 더 축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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