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른 채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습니다.

속마음

by 미쉘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온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멋진 집에서 빵으로 아침을 먹고, 어학원을 가는 길에 운전연수를 하고, 재미있는 어학원을 다녀오면 남의 엄마가 차려준 맛있는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의 나는 완전한 ‘약자’ 였기에 시집살이도 딱히 없었다. 며느리로서 나의 위치와 역할을 정확히 파악했고, 살림을 주도하는 것은 나의 역할목록에 없었다.


그렇게 삼 개월이 지났고, 시부모님은 진짜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새댁인 나에게 시부모님과 함께 한 삼 개월이라는 시간은 분명 삼 년처럼 힘들고 길었지만, 배웅 나간 공항에서 왜 그렇게 펑펑 울었던 건지 지금도 알 수 없다.

“ 울어? 야~~ 시부모님이 갔는데 자기는 왜 울고 있냐? 세상에 그런 며느리가 어딨 냐? “

“그러게 내가 왜 울지?”

“와. 이제 자유다 우리만 남았네. 우리 재밌게 잘 살아보자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는 늘 넉넉한 지원을 해주는 대신, 선택의 기회를 가져가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는 부모님의 간섭이 싫어서 유학도 공부도 하지 않았고, 방황하는 사춘기를 보냈다고 한다. 제대하고 나서야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본인 마음대로 진로를 결정했고, 이민도 선포(?) 했다고 한다. 내가 만약 그였다면, 나는 ‘선택의 자유’ 보다 ‘빵빵한 지원과 간섭’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았을 것 같은데, ‘가진 자’ 뭘 모른다. 시부모님과 삼 개월을 함께 살고 난 후 ‘ 자유’를 외치는 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내 눈에 그는 주어진 것에서 오는 많은 혜택들을 이미 즐기면서,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는 열심히 일을 했고, 그가 일하는 8시간 동안 나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다.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남의 집이라 느껴지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어색했고, 두 다리 뻗고 늘어질 수 없는 불편한 집이기도 했다.

내 이속만 차려도 되는 상황인데 그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도서관에서 영어공부를 하며, 때로는 게으름을 부리며 하루 종일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완전히 다른 삶 속에서 행복과 불행을 논하기엔 빈틈없이 흘러갔던 시간들이었다.


그는 영어를 잘 들었고, 나는 그 보다 말하는 게 좀 더 낳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함께 다녀야 했다. 그가 들어주면 나는 말을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늘 같이 다니는 잉꼬부부로 소문이 났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일 년이 지나자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민성 인터넷서 사이트에 들어가 영주권신청에 관한 사항을 검토했다. 영주권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일 년 동안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학교로 돌아가면 나는 영어를 좀 하는 능력 있는 교사가 될 수 있었고, 승진 점수도 더 딸 수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 다시 방문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영주권이 나와 버렸다. 모두들 일 년 만에 영주권이 나오기는 드문 일이라며 축하를 해주었고, 박수를 치고, 축배를 들었다. 이제 돌아갈 기회가 없어진 것 같아 허탈하고 우울한 내 마음 같은 건 아무도 몰랐다. 받아들이기로 해놓고, 일 년이 지나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은 마음상태 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사직’ 이 아닌’ 휴직 중’이었으니까… 이번엔 그의 동생 시누이도 함께 방문했는데 나더라 이 집에 며느리가 아니라 실장으로 취직한 것 같다고 했다. 이곳에서 살기 싫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곳에 사는 동안은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야 맞는 것 같았고, 돈을 받아 공부를 했으니 필요한 부분은 성심껏 (못하더라도) 돕는 것이 내 몫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그 시절 전자사전을 손에 늘 들고 다니며, 되지 않는 영어로 가족들의 일처리를 도 맡아했으니까. 그때는 몰랐다. 시누이가 영어를 엄청 잘한다는 사실을.. ( 그때의 영어로 니 앞에서 통역사 역할을 했으니. 쥐구멍으로 숨고 싶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이곳에 온 지 6년이 다 되었다. 동반휴직 (배우자가 해외에 취직을 하여 일을 할 경우 쓸 수 있는 휴직) 두 번이 지났는데, 한국으로 갈 생각은 없는 것인지 그는 본인의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다. 이제는 18개월이 막 지난 딸아이 앞으로 나오는 육아 휴직을 쓸 차례였다. 아직도 나는 쓸 수 있는 휴직을 다 쓰면 이제 그만 한국의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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