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른 채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습니다.

현지인 트랜스포메이션

by 미쉘



왕궁으로 시집간 양반집 딸은 왕세자비로서의 품격과 교양을 갖추기 위해 그 신분에 적격 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느라 분주한 왕실의 하루하루를 보낸다. 궁으로 시집온 것도 아닌데 나는 뉴질랜드에 도착하자마자 배울 것이 아주 많은 나날들을 보냈다. 친정 부모님으로부터 교육받은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예의’ 같은 것들을 지키느라 귀국한 다음날부터 부엌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나면 벌떡 일어나야 했다. 시집간 새 며느리는 한 달간 한복을 입고 아침에 나가야 한다는 엄마의 가르침이 있었던 바, 졸린 눈을 비비며 한복을 주섬 주섬 입고, 부엌으로 나갔다. 지독히도 유교적인 우리 집과 달리 진보적인 이 집안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어른말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는 난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복을 입고 방을 나섰다. 한복 입은 나를 보자마자 부엌에서 일을 하고 계셨던 어머니는 박장대소를 했고, 그래도 잘했다며 칭찬을 하셨다.


“ 들어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라. 한복은 이제 안 입어도 되고 피곤할 텐데 아침에 안 나와도 된다. 우린 아침에 빵을 먹으니 아침을 차릴 일도 없고, 각자 다 알아서 먹도록 하자.”


‘빵을 먹는 다고? 아침에 늦잠을 자도 된다고?’ 빵을 먹는다는 소리는 아침에 밥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나 또한 빵으로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밥 순이다. 밥과 국 여러 가지 반찬을 놓고 삼시 세 끼를 먹어야 든든한 , 제일 좋아하는 밥상은 각종 나물과 쌈, 고등어조림이나 불고기 같은 것으로 차려진 시골 밥상이다. 하지만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은 속불편한 편리한 출발이었다. 어른의 말이라면 곧이 곧 대로 듣는 나는 그다음 날부터 아침을 차리러 일찍 나오지도 않았고, 부엌에서 소리가 들려도 빵을 드시나 보구나 하면서 아침잠을 더 청했다. 나의 부모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 어르신들이 신기하기만 했고, 불편했지만 이 분들의 말듣 기는 내 몸이 편한 쪽이라 좋았다.


“캐빈한테 연락해놨나? 오늘 몇 시까지 간다고 했지?” 아버님이 그에게 물었고, 그는

“응 9시에 약속해놨어요.”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는 아버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고 내가 눈짓으로 묻자, 내가 다닐 어학원을 알아보러 간다고 했다.

어제 뉴질랜드에 도착했는데 다음날 어학원을 알아보러 간다고 했다. 미리 좀 말을 해 주지…

약속을 해 놨으니 따라 나 설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돈도 다 내어 주고 나는 공부만 하면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인간답게 살게 될 거라는 말 이런 거였나….?’ 그의 부모님은 나와의 만남에서 상견례에서 언제나 ‘뉴질랜드에서의 인간답게 사는 인생’을 이야기하시며,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꼭 뉴질랜드에서 살기를 바라셨다.


누구도 영어를 특별히 잘하지 못했으므로 주변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 둔 모양이었다.

“얘는 일해서 돈 벌어야 하니까 영어 공부는 네가 열심히 해야 한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나는 진짜 영어공부만 하면 되는 거였다. 공부해서 집안의 각종일들을 처리하고, 나중에 아이들이 생기면 아이들의 학교생활 뒤 바라지도 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2년의 투자를 약속하셨다. 본인의 아들은 돈을 벌고, 며느리는 영어를 해서 완벽한 이민 생활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계획한 그의 부모님의 계획이었다. ‘ 내가 해외에서 영어공부라니…” 영어, 해외유학, 어학연수 이런 것 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 꿈도 꿀 수 없었지만, 내 관심 밖의 일이었다. 눈앞에 주어진 것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 해 사는 삶에 그런 것들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며느리 로서의 역할이 아침상을 대령하는 것이 아닌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한국의 며느리는 영어공부를 함으로써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부담이 같이 왔다. 그러니까 내가 영어로 소통을 해야 이곳에서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인데.. 나는 원하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역할 분담에 가슴이 좀 답답하긴 했으나, 돈이 없어서 공부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나로서는 굳이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사실 자신은 없었다.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와 내가 온갖 궂은일을 하고 당하며 출발했을 이민 생활인데 이렇게 스무스한 출발이 또 있나…. ( 그의 부모님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민은 오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그날 바로 무작정 레벨 테스트 시험을 봤다. 외국인이 말하는 입모양도 아직 신기한 나였는데 영어가 들릴 일도 말할 일도 없었다. 당연히 왕 초보가 나왔다. ‘I am a student.” 밖에 기억나지 않는 고등학교시절 ‘척’했던 나의 영어는 어리둥절한 상황에 한마디도 한 단어도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초급반부터 시작하면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이 어학원을 다녀야 하는 건지, 돈은 얼마나 드는지 생각하며, 어학원을 걸어 나왔다. 처음부터 시부모님의 돈은 받을 생각이 없던 나는 앞으로 이 돈을 갚아 나갈 일이 막막했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시내로 갔다. ‘시내가 있다니……’ , 이제야 5층 정도 짜리 건물이 보이고, 상점들이 보였다. 초록 들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상점이 있고, 그리 높지 않지만 높은 건물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시내는 아담한 유럽의 한 도시 같았고,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시내에서 가장 크다는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에스컬레이터도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보는 순간 ‘ 그래도 살 만하겠다.’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숨통 튀는 쇼핑도 할 수 있고, 사람구경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


“ 여기 에스컬레이터 처음 생기고 사람들이 신기해서 이걸 타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어.”

‘흠.. 내 시골 고향에는 몰도 없고 에스컬레이터도 없는데.. 만약 그곳에도 이런 것이 생긴다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며칠을 테스트해 볼 것이 뻔한데.. 남편은 뭘 모르는 군.!’


시내 구경을 잠시한 후 무거운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어머니께서 차례 준 맛있는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다시 아버님에게 끌려 나갔다. 아버님은 본인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운전을 마스터해 주어야 한다며, 이곳에서 운전을 못하면 고립된다며, 예고도 없이 운전대를 잡게 하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어제 이곳에 도착했다. 겁도 많고, 어른의 말이 라면 주눅이 들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그런 사람이다.


뉴질랜드는 한국과는 다르게 오른쪽에 운전대가 있다. 아직 방향감각이 생기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장롱면허만 5년인 나는 한국에 서건 뉴질랜드에 서건 운전은 왕 초보였다. 갑작스러운 운전 연수를 받은 후, 만신창이가 된 나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운전연수가 어땠냐는 그의 물음에 그동안 꾹꾹 눌러 두었던 서러움이 폭발했던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이곳에서 왜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영어도 왕 초보, 운전도 왕 초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발끝보다 더 아래로 꺼져버린 자존심, 자존감, 열등감, 수치심. 나는 내 교실을 이끌어 가던, 내 인생을 이끌어가던 주도적인 사람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바보 멍텅구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작아지기 시작했고, 자존감은 자취를 감추었다. 자신을 깔아뭉개었고, 모든 것이 남 탓이 시작되었다. ‘유치원 교사’라는 직업을 왜 선택한 것일까? 영어 교사 외에 교사라는 직업은 본국에나 쓸 만하지 영어를 못하면 아무 쓸데가 없는 직업이었다. 고로 나 또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이었다. 집은 왜 그리도 가난했을까? 운전면허는 필수라고 따라고 등 떠밀어놓고 차 한 대 지원도 못해줄 거면서 면허는 왜 따라고 한 것일까? 왜 엄마는 내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던 걸까? 엄마가 한 번이라도 반대했더라면 포기할 수 있었던 결혼이었다. 외국에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걸까? 그는 왜 영어도 못하면서 이민을 선택한 것일까? 럭셔리 하우스에서 모든 걸 다 지원받고 있던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라해지고 초라해져서 지옥 같은 마음만 들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음날 주유를 하기 위해 주유소에 멈췄다. 주유소에 멈추는 용기, 주유기에서 주유를 할 수 있는 익숙함, 돈을 지불하러 샵으로 들어가는 그의 자신감 모든 것이 대단해 보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간덩이 작은 나는 대성통곡을 하고 나서야 지금부터 모든 것을 잘 배워서 사람구실하는 사람으로 이곳에서 살아 보리라 하는 악바리 마음을 먹게 되었다. 죄책감이나 돈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접어두고 시부모님의 지원을 이용해 이곳에서도 잘 살아나가는 ‘나’로 살아보겠 노라고 다짐한 후였다. 주유는 어떻게 하는 건지 밖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요트를 차 뒤에 걸고 운전하는 사람들, 자전거 4대씩 천장이에나 차뒤에 매달아 놓고 주유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레저 활동을 많이 한다고 했다. 동해도 송도도 아닌 여름휴가기간이 아닌, 그냥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과 비교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광경을 흔히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모두 일하느라 아등바등 사는 한국인들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느리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 사람들이 타는 차들은 모두 ‘기아’ ‘현대’ ‘도요타’ ‘마쯔다’와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 수입해 온 차들이었다. 차도 자전거도 요트도, 심지어 입고 있는 옷, 신발마저도 ‘메이드인 차이나’….. 모두 아시아 국가에서 수입해 온 것들이었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 나라 사람들이 뼈 빠지게 연구하고 일하면 이런 나라 사람들이 특히 서양인들이 그걸 가지고 놀고먹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힘들게 살지 않아도 다 가진 것 같아 보였고, 그런 모습들에 반감이 생기면서도 나도 이제 이 사람들처럼 주어진 것을 누려가며 , 좀 편하고 느리게 살아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그동안의 나답지 않은 마음이 슬며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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