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른 채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미쉘

뉴질랜드는 오후 5시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퇴근을 하여, 가족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 수 있다던 그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가족처럼 평화로운 저녁식사 자리를 꿈꾸었다.


그의 말처럼 삶이 그렇지가 않자, 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원망스러운 마음만 커져갔다. 가게를 한 이후로 그의 생활은 새벽에 나가서 밤이나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로 인해 두 살 반 터울의 아이들을 하루종일 혼자 돌보는 일이 계속되었고, 얼마 후 그와 나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걷지 못할 지경의 허리 통증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비틀어진 허리로 버티기를 하며 어린아이들을 키웠다. 역할의 책임을 다하면 다할수록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원플러스 원으로 따라온 마음의 병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운전길에 이유도 모를 공포감과 그로 인한 '그 길'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를 몰아세웠다. 그의 공포증은 날로 심해져 우울증이 되었다. 일을 마친 후 귀가하는 그의 모습은 물에 젖은 생쥐 마냥 축져져 있었다.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아무 말이나 지껄여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는 것이었다. 주말이면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고기 굽고 술잔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고, 목적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시간들이 오래 이어지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이민자로서 의 정체성도 잊은 채 그냥 버티기 위해, 푸념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 같았다. 결국 그는 일 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돈을 적게 버는 대신 건강을 챙기는데 시간을 투자하는 방법을 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뉴질랜드의 복지정책 때문이었다. 자녀가 있다면, 부모의 수입에 따라 지급되는 정부 지원 양육수당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돈으로 적어도 아이들 앞으로 나가는 지출은 해결이 되었다. 지금은 한국도 양육수당이 지급되지만, 그 당시 한국에는 그런 복지혜택이 전혀 없었던 터라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잘 양육해 달라는 이 사회의 묵언의 메시지가 마음에 들었다. 또, 우리가 어린아이 둘을 양육하며 가게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이 작은 커뮤니티 사람들의 지원도 컸다. 모든 것이 다 오픈되어 있는 이곳에서의 삶이 싫었지만, 모든 것이 오픈되어 있었으므로, 손님들은 우리의 어려움을 알았고, 자주 닫는 가게이지만, 깔끔한 그의 음식을 좋아하는 단골손님들이 감사하게도 늘 가게로 되돌아와 주었다. 요식업 경쟁이 치열한 한국에서는 망해도 벌써 망했을 가게 운영이었다.


그가 힘들어하는 시간 동안,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채워진 첫 단추, 그것은 바로 ‘집’ 임이 단정 지어졌다. 집을 유지하느라 필요 없는 지출이 너무 컸고, 외곽에 있는 집 때문에 사람 들과의 교류도 쉽지 않아 외로웠다. 마침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 대한 트라우마도 생기게 되었으니, 우리의 외로움과 우울함의 이유를 찾은 것 같았고, 이사를 결정했다. 그의 아버지가 수많은 수고로움을 들여 지은 이 멋지고 소중한 집을 팔겠다고 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0년을 약속했고, 10년 후, 집을 파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잠옷을 입고 있으면 한없이 게을러진다. 운동복을 입고 있으면, 더 빨리 뛰게 되고, 예쁘게 차려입으면 좋은 레스토랑에 가는 일이 좀 더 당당해진다. 화려한 집에 살면서 나는 부자인 듯 착각에 빠져 10년이라는 허성 세월을 보낸 건 아니었을까? 그 집에 살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좋은 집에 살아봤던 경험과 어린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의 혜택 정도였다. 하지만 그 집은 너무 추웠고, 너무 완벽했고, 너무 쓸쓸했다. 그 집으로 초대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우리를 평가했고, 다른 이민 1세대와 다른 게 편하게 이민 와서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고 선을 그었다. 이리저리 이용하려 들고 빼앗아 먹으려 드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모두 보였다. 나는 늘 그들의 입장에 있었었고, 그때도 그들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공감을 나누었던 한국 이민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편견으로 우리를 대하는 것도 알았고, 틈 만나면 입던 옷이지만 비교적 질 좋은 한국에서 온 아이들의 옷 꾸러미를 풀어 대는 나의 물질공세로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이미 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었으므로, 곧 나도 그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진심을 믿는 사람이다. 혹자는 나보고 뜬금없이 혼자 순수하다고 하며 비웃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은 진심과 통한다고 믿는다.


아이들 덕분에 자연스레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고, 나는, 우리는 그런 관계에 의지하며 살기 시작했다. 영어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을 해결하고, 부모로서 또 이민자로서의 삶에 대한 고충을 나누며, 서로서로 의지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믿었다. 그 든든한 사람들을 내 마음 구석구석에 채워 넣었고 나 자신을 그 사람들에 맞춰 재구성하며, 이민자로서의 근육을 만들어 나갔다. 이제는 한국사회에서는 왠지 쓰기 어색한 단어가 되어 버린 ‘이웃사촌’이란 말을 써도 어색함이 없었고, 실제로 우린 모두 이모와 삼촌으로 통했다. 우린 가족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실로 나에게는 커다란 변화였다. 내향 인인 나는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내 집에 사람 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내 집을 오픈한다는 뜻은 나의 모든 것을 오픈하겠다는 의미로 여기는 나에게,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은 밥을 대접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맛이 없으면 어쩌나, 안 좋아하는 걸 대접했다가 민폐를 끼치면 어쩌나 하는 온갖 걱정에 지쳐 늘 포기하는 일이다. 집에 손님이 올 때는 최소한이라도 집안을 깨끗이 하는 일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이라고 교육받았다. 한마디로 귀찮고 번거롭고,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을 만난 뒤로는 그런 나의 면을 꼭꼭 감추어야 했고, 그 비밀은 꾀나 자연스럽게 지켜졌다. 그녀들처럼 집에 사람을 들일 때, 먹일 때, 함께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때, 아무 이야기나 떠들어 댈 때, 루머에 반응할 때, 주변에 사람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불어 살아가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나 자신을 뒤로 한채, 관계 속의 괴로움을 억누른 채, 다른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맞춰가며, 더불어 살아가는데 일인자라도 된듯한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이곳에서 내 삶의 버팀목이었던 사람을 잃을까 봐 두려워 나를 태우고 태웠다.


사람의 관계는 절대 일방적일 수 없다고, 서로 주고받는 건강한 사이가 되어야 하는 거라고, 바라지도 말고, 손해 보지도 말아야 오래 지속되는 사이가 될 수 있다고, 나를 잘 아는 엄마는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않도록 말해주었다. 주변과 잘 나누며 살아가라고, 좋은 마음으로 잘 나누지만, 단 이민 사회에서는 같은 민족을 조심하며 사귀어 지내어 나가라고 시어머니도 말해주셨다. 그럼에 불구하고 주었고, 나누었고, 다른 사람들로 나를 채우면서 … 나를 태워나갔다. 이제는 남은 장작마저 다 타버리고, 남은 불씨도 얼마 남지 않을 때까지, 재가 되어 버릴 때까지 그렇게 앞뒤 보지 않고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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