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마흔이 넘어간 지금 우연히 ‘디자인 학과 대학생’이라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새로운 출발은 ‘셀프 마음 치료’와, ‘나 공부’를 하며, 그동안 이상한 동굴에 갇혀 잃어버렸던 진짜인 나를 찾게 해 주었다. 바쁜 만학도 생활은 우울함을 잊게 해 주고, 또 다른 면의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해 주었다. 학교생활을 하며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하게 되었고, 오래전 그 단단한 내면을 가진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사람에 대한 기피증은 온라인상에서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한민족에 대한 그리움은 온라인 독서모임과 글쓰기 모임 사람들로 대신 채우고 있다. ‘어이없는 순진함’ 은 글쓰기 친구들과 글쓰기를 할 때만큼은 비난받지 않아 좋다. 글쓰기와 책 읽기는 불쑥불쑥 올라오는 억울한 마음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만들어 주고 있고, 디자인 학교생활을 시작으로 찾게 된 그림에 대한 흥미는 표현에 대한 나의 욕구를 잘 채워주는 도구가 되었다.
새하얀 새집을 팔아버리고, 60년 된 낡은 집으로 이사를 온 뒤, 돈이 줄줄 새어 나가는 골칫덩어리를 안고 산다. 하지만 이 집은 우리 가족을 더 끈끈하게 모아주는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 서로 힘을 합쳐 잡초제거를 하지 않으면 정글이 되어버리는 큰 나무가 많이 있는 정원은 여름철이면 우리 가족에게 일거리를 주기 바쁘다. 낮시간이 긴 뉴질랜드에서 외로운 이민자에게 일거리가 많은 것은 축복인 듯하다. 외로울 틈이 없으니 말이다. 또 큰 나무에 수시로 올라가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집이 바로 궁전이 아닌가 싶다.
럭셔리 하우스가 아니라서 마당에 키울 수 있는 닭들은 ( 마음 편히), 동물이라면 질급 했던 나와 아이들에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서로 협력하고, 타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는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 마음을 주고, 인간관계가 아닌 닭들을 돌보는 것에 좀 더 많은 애정과 시간을 할애한다. 복잡한 마음도 감정도 생성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방학이면 한 달 살기를 했던 할머니댁 동물들도 소환이 되고, 아이들과 이야기 꽃을 피운다.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추억이 방울방울 샘솟아 행복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진다. 계란도 매일 얹으니 더 좋다. 관계란 주고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4개의 집에 둘러싸여 있지만 큰 나무를 울타리 삼아 사생활이 보장되는 집이다. 그러면서도 동네에는 학교가 많이 있어서 길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사람이다. 학부모이거나 남편 가게 손님이거나, 이웃집 사람들이다.
내가 "Hi" 먼저 할 때도 있고, 사람들이 " How are you?"를 먼저 할 때도 있다. 인사만 하고 지나치더라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웃는 순간은 정말 기분이 좋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동네에는 카페도 두 개나 있고, 조금만 걸어가면 큰 슈퍼마켓도 있고, 남편의 가게도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많이 나는 그 전과는 참 많이 다른 이 동네가 좋다. 다행히 그전의 집을 팔아 오래된 집이지만 아이들 키우기 안전하고 학군이 좋은 동네에 이사 올 수 있었다. 이곳에 이사 온 후, 화려한 생활과 부자라는 착각은 끝이 났다. 집을 고쳐가며 사느라 밑 빠진 독에 물 붙기를 하고 있고, 아이들이 커버린 지금 교육비와 생활비가 늘어나 이제는 외벌이로는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이 집을 지켜내고 있는 이 뿌듯함은 우리 가족에게 커다란 행복을 주며, 이제 일 년을 앞두고 있는 나의 대학생활생활은 우리 가족에게 두 배의 수입을 가져다줄 것이므로 희망찬 우리에게 우울함은 없다. 조금 힘들기는 하다.
빛이 살며시 반사되는 고요한 호수 표면에 불쑥 튀어 올라 잔잔한 물결을 뒤엎어 버리는 물고기처럼, 생활 속에서 불쑥 마주친 그 사람들이 힘이 들 때가 많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제는 눈을 마주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진심을 담지 않고 대화하는 방법도 조금씩 터득하고 있다. 최고의 방법은 웃으며 인사만 하고 얼른 자리를 뜨거나, 최대한 말을 아끼고 듣기만 하는 것인데, 한때 가족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할 때마다 가슴이 절여온다. 아직도 많은 수련이 필요한 모양이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덥석 이민을 온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나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마음을 모두 다른 사람과 다른 문화, 다른 언어로 가득 채워 놓고,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서 행복하길 바랐다.
이민 전, 결혼 전의 내 모습이 진짜인 내 모습이었는데, 일찌감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현명했던 젊은이였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 자존감이 낮았던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가난했고, 지쳤었고,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남의 나라 땅이지만 ‘나’를 잃지 않고, 잘 살아나가는 방법을.. 너무나 기본적이지만 너무나도 어려운 바로 ‘나’를 잘 알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존중하되 그것에 나를 꼭 맞출 필요는 없다. 내가 다른 이들과 그 문화를 존중하듯 다른 이들도 나와 나의 문화를 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님을 잘 알고, 털어버리면 그뿐이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일도 내 잘못도 아니다. 이것은 이민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더라도,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있더라도, 또는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더라도, 새 친구를 사귀더라도, 나를 잃지 않는다면, 내가 내 마음속에서 중심이 된다면, 어떤 다른 세상도, 상황도 그리고 관계도 조금은 더 여유롭고, 지혜롭게 받아들이고 또 흘러가게 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