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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이드모드가 된 여름 어느 날

by 미쉘

며느리+가이드모드가 된 여름.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오히려 구직자의 정신건강에는 좋은 나날들이다.

직장을 하루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수정할 일도, 구인자의 연락을 기다릴 일도 없으니 말이다.


학교를 다니기 전 풀타임 가정주부였을 때는 몰랐던, 가정주부 모드가 된 온전한 삶이 급 좋아지는 이상현상이 생겼다. 삼시 세 끼를 지으며, 바닥에 흘린 티끌들을 주워 담으며, 변기 뚜껑을 매일 같이 닦으며, 조금의 양이라도 매일매일 세 번씩 세탁기를 돌리며 드는 구직자의 생각은. 가정 주부이고 싶다... 이일을 이렇게 잘해보고 싶다.. 였다.


예전엔 가정에서 하는 이 일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었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 메뉴를 의논하는 일이 원초적인 것 같았고, 한시간 이상 씩 한 끼 밥상을 장만하는 일에 시간을 쓰는 일은 비효율의 극단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구직자의 시선이 달라졌다.

신선한 재료를 구해다 매 끼니를 새로운 밥상을 선사하시는 시어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귀하고, 귀하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행복해 보이고, 구직자 또한 행복하다.


이런 행복한 밥상이 엄마를 그 엄마로 기억하게 하는구나.....


완벽한 설거지는 물론, 냉장고도 매일매일 청소하고, 밥 먹고 나면 집안 정리를 말끔히 한다. 그다음 끼니를 위해 또다시 같은 사이클을 반복한다. 단순한 노동이 반복되는 하루들이 지겹고 무기력했던 그 시절의 나를 느끼는 나. 구직자의 시선이 달라졌음에 축배를 들 듯, 커피 한잔을 내려마시며 잠시 정원에 찾아오는 새들과 나뭇잎들의 살랑거리는 모습을 감상한다. 중단된 독서 '월든'을 읽는 듯하다.


그동안 살았던 내 집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오래되어 고칠 곳도 많은 집이지만 구석구석 닦아주니 이렇게 빈티지 느낌 나는 트렌디한 집이 아닐 수 없다.


가이드, 주부 모드 3주 차.


43년을 통틀어 처음으로 받아 보는 영어로 된 한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당신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가 흥미로우니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메일이다.


머릿속에 꽉 차있던 안개를 살짝 걷어 내듯 이메일을 이해한 구직자는, AI Tool을 이용하여 적절한 답장인지 검사받고, 초 긍정의 답메일을 보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기쁘고 설레었다.


이제 직장생활을 해보는구나.

직장생활을 해보고, 우리들의 통장에 내 이름 앞으로 세 자리가 넘는 숫자를 찍어보는 날이 오는구나.


인터뷰는 일주일 뒤로 잡혔다.

설레었던 감정은 잠시뿐, 하루하루 손님 치르기 바쁜 구직자는 면접 하루 전에야 드디어

학교 다닐 때 받아두었던 면접 예상 질문리스트를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연습을 해보았다.

한 달가량을 한국말만 썼는데 영어가 잘 나올 리가 없었다.


질문 몇 개 읽어주며 도와주던 남편은 연습을 좀 하고 오라며 더 이상 도와주지 않았고, 잘못된 점만 지적당하는 그와의 연습은 연습이 아니라 부부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 이내 접었다.


그래 역시 인생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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