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제목을 쓰고 책을 집어들어 이 두꺼운 책의 어느 한 쪽도 접힌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평소 일절 책에 밑줄을 긋지 않는데다 인상적인 구절이 무척 많았는데도(!) 책 귀퉁이 한 곳 삼각모양으로 접어 놓지를 않았네. 아 이런...
오늘의 교훈은 책 읽고 있는 시점에 리뷰를 쓰자.
몇주가 지나고 나니 읽으면서 생각했던 많은 상념들이 다 안개처럼 흩어진 상태. 하하.
쓸까 말까 십분 넘게 고민하다가... 타일러 오빠가 집을 떠나는 장면부터 옮겨봐야겠다.
생각의 실마리에 불쏘시개 역할이 되어줄런가?
아버지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나는 왜 그러는지 이해했다. 타일러 오빠가 상자들을 차에 싣는 모습을 보니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 대신 뒷문으로 뛰쳐나가 언덕을 올라 산꼭대기로 향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소리들보다 피가 귀로 몰려 두근거리는 소리가 더 커질 때까지 달렸다. 그러다가 나는 몸을 돌려 다시 뛰어 내려가서 풀밭을 돌아 빨간색 기차간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서둘러 객차 지붕 위로 올라가니 마침 타일러 오빠가 트렁크를 닫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 것이 보였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오빠가 내 이름을 부르고 대답이 없자 얼굴이 시무룩해지는 광경을 상상했다.
내가 객차 지붕에서 내려왔을 때 오빠는 운전석에 앉았고, 쇠로 된 탱크 뒤에서 내가 뛰어나왔을 때 오빠는 흙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가고 있었다. 나를 본 오빠는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나를 안아 줬다.
어른들이 종종 몸을 숙여 아이를 안아 주는 그런 포옹은 아니었다. 오빠는 나를 가까이 당겨 오빠와 내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했다. 오빠는 내가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하고는 물러서서 차에 탔고,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가 국도를 달렸다. 나는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쪽을 바라봤다. p.92
믿기 힘들 정도의 폭력에 노출된 어린 아이들의 삶과 야만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집의 가정사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실화'라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책 제목 해시태그를 검색해보니 역시 세계 각국 독자들이 이게 실화였다니 놀랍다는 글이 죄 적혀있더라.
미국 아이다호 주에서 몰몬교를 믿으며 살아가는 이른바 레드넥(red neck)이라 불리는 백인 하층민의 가족이야기가 그려진다.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는 공교육과 정부, 예방주사를 거부하는 부모의 딸로 자라며 고철수집과 폐차처리장에서 '목숨'을 걸고 아빠, 오빠와 함께 일한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이들 가족의 목숨은 여러개가 아닐까 싶을정도로 살이 불에 타고 거대한 기계에 팔다리가 잘리고 교통사고로 뇌수가 빠져나온다. 그것도 수차례.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는 너무 힘들어서 이 책을 과연 완독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들에게 이러한 삶을 허락한 신은 어떤 존재인가 책을 읽으며 생각하기도 했다.
신은 자비롭지 않으신 분같다.
집을, 부모를 떠나는 타일러 오빠로 인해 타라 역시 자아의 목소리에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수 있게된다. 훗날 결국 부모와 절연하게 되는 상황에서 타일러 오빠의 존재가 그녀의 가슴 속 촛불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책 초반에 나오는 타일러 오빠와 타라가 헤어지는 대목은 큰 사건도 그리 의미심장한 부분도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데 얼마나 가슴이 절절하던지 잊지 못할듯 하다.
또 타라 웨스트오버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가서 연구를 하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뇌했던 마지막 여정은 아름답고 처연했다.
그 과정에서 타라가 '페미니즘'에 대해 언급하고 그 바운더리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되는데 어찌보면 뻔한 공식아닌가 싶지만 그녀의 깊은 사유 안에서 나또한 함께 고민을 한 지점이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존 스튜어트 밀의 책에서 그녀가 발견한 <그 주제에 관한 어떤 지식도 최종적 결론이 될 수 없다.>이 언급된 부분이다.
밀이 염두에 둔 주제는 여성의 본질이었다. 밀은 여성들이 너무도 긴 세월 동안 강제당하고, 회유당하고, 옆으로 밀려나고, 여성적이라는 미명하에 일그러져 왔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타고난 능력과 염원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p403
이 구절을 읽고 동동에게도 얼핏 식사하며 이야기를 들려줬었는데 아마 내 설명이 충분치 않아 이해하기 힘들었을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읽어볼테지.
평소 가족 내 '역학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인지라 잠들기 전 이 부분을 읽었던 밤에 많은 물음표와 느낌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의 미래는 어머니, 오빠의 미래는 아버지였다. 두 단어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자 주도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가족의 질서를 잡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질서를 잡히는 대상이 되는것이었다.
나는 나의 갈망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지식,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 머리에 심어진 것들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때로는 속삭이고, 때로는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염려를 하며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그 목소리는 내가 옳지 않다고 속삭였다. 내 꿈은 왜곡된 것이라고, 그 목소리는 여러 사람의 것이었고, 다양한 말투로 나타났다. 어떨 때는 아버지의 목소리였지만, 나 자신의 목소리였던 경우가 더 많았다. p. 403
타라 웨스트오버, 나는 무엇보다 그녀가 엄청난 자기 객관화가 가능했기에 새로운 삶을 살아낼 자격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96년 생 아이다호의 몰몬교 부모의 막내딸 '타라'로 태어났다면 난 아직도 그 아버지와 함께 복숭아 통조림을 만들며 종말에 대비한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을 것 같다. 내게 주어진 부모, 마을, 아침마다 먹는 시리얼 그릇을 연극 무대를 보듯 멀찍이 떨어져 관람할 수 있는 제3자의 눈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살면서 가장 힘든일이라 확신한다. 그런데 타라는 십대 소녀일때 알을 깨부수고 헤세가 말한것처럼 나왔다.
그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새삶을 살고 싶었을테지만 자신의 과거와 직면헤 그 안으로 다시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지극히 정상의 삶을 사는 이들과의 간극에서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러다 이걸 주제로 학위도 받고 하바드 가서 장학금도 받더라.
아마 아이다호에 남은 가족들은 "타라, 고것 혼자 정신승리하고 있다."고 했을테다.
사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문장이 너무 좋아서 인상적이었는데 지금 잠시 눈길을 뒀던 페이지를 다시 읽어도 참 좋다. 아이들이 더 크면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