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여행을 추억한다
<이 글은 작년 2020년 6월에 쓴 글입니다.>
신세계 백화점에 가면 지하 식품관에 위치한 딘앤델루카에 들른다.
본점이나 강남점이나 지하철 연결 통로와 연결된 백화점 길목에 위치해 어수선한 건 매한가지다. 그러나 딘앤델루카 간판의 하얗게 빛나는 폰트가 주는 특유의 단정함과 마케팅 디자인 팀에서 팬톤칩 컬러를 펼쳐놓고 고심해서 골랐을 그레이 앤 화이트의 시그니처 컬러의 매력에 홀려 나는 늘 그렇듯 항복하고 그곳에 미끄러져 들어가 기어코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들고 마는 것이다.
커피의 만족스러운 크레마를 확인하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 하얀 머그잔 한잔을 앞에 놓았을 뿐인데 나는 이 브랜드가 주창해왔던 뉴욕 상류층 타겟 프리미엄 푸드 브랜드를 한껏 즐기는 올리비아 팔레르모 뉴욕 새댁(?) 정도의 기분을 잠깐 즐긴다면 약간은 과장이겠지.
애석하게도 그러나 코로나19의 풍랑에 딘앤델루카는 파산을 했다. 어디 그뿐일까, '아메리칸 스탠다드'이면서 내가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인 제이크루, 남편이 좋아하는 브룩스브라더스의 파산을 알리는 기사는 참 우울했다. 21세기 브랜드였다는 추억으로 우리 마음에 영구 소장될 터이다.
하지만, 내가 이러한 이유로 하얀색 머그컵 하나 살까 하고 직원과 대화를 하다가 딘앤델루카가 파산은 했지만 태국에서 사들였고. 국내 딘앤델루카도 신세계에서 계속 운영한단다. 하핫. 그래서 머그컵은 안사고 나왔다.
딘앤델루카에 대한 추억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과 단 둘이서 뉴욕 책방 여행이라는 컨셉으로 일주일 넘게 뉴욕을 여행했던 때 였다.
스콜라스틱 출판사를 찾아가는 날, 아침 식사를 딘앤델루카에서 간단히 해결하러 들어갔었다.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주문하면서 커피를 주문하는데 중국계로 보이는 나이든 아주머니 직원이 커피에 크림 넣어 말어? 하며 소리를 질렀다. 중국 억양이 들어가있어서 "잘 안들려 뭐라고?"하니 거의 고함수준으로 되묻는 통에 나는 크림이라고 대답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크림 넣은 맛없는 커피를 마신 기억이 있다. 출근 시간이라 뉴요커 직장인들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러 줄을 길게 서 있어 더 창피했다.
오늘 신세계 백화점에서 적당히 바디감과 오일리한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시며 이날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누구나 그리워하는 언제 가능하게 될지 모를 '여행'이었고 사랑하는 아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도 했다.
문득 난 그 순간 작게나마 깨달았다.
아이가 내게 줄 기쁨을 그때 한꺼번에 다 불입했을지 모른다고.
이제 더는 없어, 이런 뜻이 아니라. 이미 난 차고 넘치게 받았다. 다만 그 총량이 그때 다 소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난 매 순간 아이를 키우며 하나님에게, 때로는 마음 속으로 늘 되뇌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예쁜 아이를 아들로 만났을까."하고.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이 아이가 선물처럼 왔다.
키우면서 늘 나를 놀라게 했고 같이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책을 읽고 예쁜 말을 하는 아이가
나에겐 너무 과분한 존재였다. 그리고 난 그닥 뻔뻔한 성격은 아닌지라 매 순간 그 사실을 적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언젠가 어떤 해외 독립 영화에서 엄마가 7살 쯤 된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 걸어 나오자 입 벌려봐 하고
입안에 코를 넣고 킁킁 맡는 장면을 보고 나는 기절을 할 뻔 했다.
내가 매일 그랬기 때문이다. 아이의 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입냄새인데 이렇게 표현하는건?) 마저 아침 시간 나에게 달콤한 그 무엇이었다. 그 냄새가 너무 좋았다.
샤워기에서 방울 방울 쏟아지는 물방울처럼 축복 같은 시간은 모두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
다음은 아마 아들 키우시는 분들은 아시리라.
얼마전 친한 선배랑 카톡을 하는데 그 선배가 그러더라.
자기 인생이 염세주의던 시절도 있었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들이 모든 보상이 됐다고..
하나님이 날 위해 이렇게 예비하셨구나. 라고 말하셨다.
선배와 카톡했던 그 때만해도 "그정도구나, 선배."했는데 커피를 마시며 뉴욕 여행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선배의 이 말이 다시금 다른 빛깔의 결로 되뇌어졌다.
난 이미 이 아이의 존재 자체로 넘치는 기쁨을 받았다, 아니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걸 한동안 너무 잊고 살았다.
내가 받은 선물은 다 뒤로 한 채, 내가 어른이니 한마디 더 거들어야 할 것 같고 매 순간 가르쳐줘야 아이가 제대로 자랄 것 같았다.
지난 주말 밤에 거실 테이블에 앉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여름밤에 제격인 책 아닌가.
이 책은 단 한 문장 버릴 수 없이 아름다운 책인데 그날은 이 구절이 눈이 오래 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꺠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서 몸을 뒤척이며 내가 갈 길을 일러 준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2020.6.22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