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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one Jul 19. 2022

3 | 의미와 무의미

Ludwig Wittgenstein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체계에 대한 논리적 구조는 한 개의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세계, 사고 그리고 언어에 대한 한계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 책은… 생각이 아니라 사고의 표현에 대해 한계를 그으려 한다. (…) 그 한계라는 것은…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으며, 한계 너머에 놓여져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것이될 것이다.”(TLP Preface) 의미를 가지는 명제의 조건은 탐구되고 표상과 그림의 가능성에 근거한다. 논리적 형식으로 행해지는 맥락 속에서만 이름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는 사태의 사실적 상태만이 오직 의미있는 명제로서 표상될 수 있다. 이는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연 과학적 명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로 사용되고 만들어지는 많은 수의 담론을 제외시킨다.


첫째, 논리 자체의 명제가 있다. 이것들은 사태를 표상하지 않고 논리적 상항은 사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논리 상항은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들의 논리에는 대표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TLP 4.0312) 이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정확하게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의미의 한계는 논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동어 반복과 모순, 논리적 명제는 언어, 사고의 한계이며 따라서 세계의 한계이다. 명백하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도 묘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무의미senseless’이다. 그것들은 진리표에 의해 그려지는 진리 조건 안에서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논리 자체의 명제는 “실재의 그림이 아니다. (…) 왜냐하면 논리 자체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허용하는 것이고 그 이외는 없다.” (TLP 4.462) 사실 동어 반복과 모순은 무의미하고 “그 상징만으로도 그것들이 참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 속에 논리 철학의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TLP 6.113).


*논리적 상항 : 개별적인 대상/속성/관계/진술과 같이 특정한 어떤 것에 대한 상징들인 기술적(記述的) 상항들과 달리, 명제의 형식들, 술어의 일반적 개념, 관계의 일반적 개념, 진리 함수나 일반성 또는 동일성의 문제에 관계된다. 여기 비트겐슈타인의 ‘근본 사상’은 논리적 상하들이 어떤 대상들(“논리적 대상들”)과 관계된다는 견해를 거부하는 것으로, 특히 수에 수학적 대상성을 부여한 프레게의 견해와 러셀의 유형 이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中


무의미의 특성은 논리적 명제 뿐만 아니라 수학과 표상되는 그림의 형식 자체에도 적용된다. 동어 반복과 모순처럼 문자 그대로 무의미한 것이고,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무의미한 명제는 의미를 담을 수 없다는 것(unsinnig)을 말한다. 무의미함, 즉 뜻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훨씬 근본적으로 의미의 결여일 때, 의미의 한계를 초월할 때 마주하게 된다. 무의미의 영역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명제가 발견된다. : “Sokrates is identical.라거나 “”1“은 숫자다.(”1“ is a number)”, “사물이 있다.(there are objects.)”. 일부 무의미한 명제는 속이 들여다보이긴 하지만, 다른 것들은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이론에 따라서 수행된 분석만이 그것의 무의미성을 나타낼 수 있다. 오직 세계 안에 있는 것만이 기술될 수 있기 때문에 한계의 개념과 한계 자체를 포함하여 그 이상의 것은 배제된다. 전체로서 세계를 담으려하는 시도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윤리, 미학의 명제 또한 배제된다. — 여기서의 명제는 유아주의적 진실이고, 주체의 바로 그 개념이다. 세계 “안”의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한계”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무의미한 명제의 모든 것을 망각해야한다고,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격하시키지 않는다. 그는 중대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을 구분한다.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하여질 수 없다.“ 즉, 말할 수 있는 명제로 공식화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보여질 뿐이란 것이다. 예컨대, 세계의 논리 형식과 그림의 형식을 말한다. 이것들은 상징주의(symbolism)의 기호로서, 명제의 형식안에서 그저 스스로를 보여줄 뿐이다. 심지어 형이상학, 도덕, 미학과 같은 철학적 명제도 비트겐슈타인이 기술한 ”언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이 영역에 포함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명백하게 나타낸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TLP 6.522)



REF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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