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혜더하기 Jun 16. 2020

쓰기의 소통 기능

면박 주는 남편과 속 좁은 아내의 화해

  부부 상담을 하다 보면 꼭 받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은 부부싸움 안 하시겠어요. 별반 다르지 않게 산다며 웃고 말지만, 실상은 더 치열하게 싸운다. 오히려 관계의 기술, 소통의 방법 따위는 떠오르지 않는다. 유치하고 치사해진다. 부부란 서로의 허물을 마주하며 산다. 허물이 싸움의 무기로 사용되면 생채기도 깊이 난다. 



  

  코로나 19로 집에서 복닥거리는 날이 지속되었다. 벚꽃은 만개하였다는데 여의도 벚꽃길은 폐쇄한다는 소식. 아쉬운 대로 집 앞 공원에 잠시 다녀오자며 온 가족이 나섰다. 마침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도 완화된단다. 투표한 후 공원을 돌아보자며 한껏 들떴다. 집 앞 공원 가기를 봄 소풍 떠나는 아이의 마음이 되었다. 딸과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투표소에 도착하자 긴장감이 흘렀다. 출입문까지 손 소독제의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고 투표 대기자들은 앞뒤 넓은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비닐장갑을 받아 들고 긴 줄 뒤에 섰다. 뒤로 딸과 남편이 섰다. 엄숙하기까지 한 투표소에서도 들뜬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뒤로 돌아서서 딸과 입 모양으로 단어 맞추기를 하며 줄이 줄어드는 대로 뒷걸음질 쳐 꼬리에 따라붙었다. 까르르 웃으며 장난을 치다가 뒷걸음질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투표소의 자원봉사자가 나에게 오더니, 앞사람과 간격을 유지해달라며 저지했다. 무슨 일인가 하는 시선이 몰려 움찔했다.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간격을 맞추며 바로 서는데 남편이 면박을 주며 더 뒤로 잡아당긴다.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듯. 몰려있는 시선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듯. 감정이 상했다. 나는 왜 이러냐며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흥겨웠던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투표소까지 손을 잡고 걸었던 딸이 다시 슬그머니 손을 잡는다. 나와 함께 들떠 있던 딸이 주눅 들어 있다. 딸을 생각해 남편에게 사과하고 즐겁게 산책을 할까 싶다가 약이 오른다.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남편은 도리어 더 성이나 보인다. 적반하장의 태도에 화가 나 잘잘못을 따져 물으려다 싸움이 커질까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은 다물었지만 속은 부글거린다. 잠시 스마트폰을 쥐고 딸의 손을 놓았다. 메모장 앱을 열어 내가 무엇이 서운했는지, 그때 어떻게 해 주길 바랐었는지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입력해갔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 묻는 것이 얼마나 무안한 일인 줄 알았다며, 딸에게 그렇게 했던 것을 반성한다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감정을 배설하듯 후루룩 메모장에 글을 쓰고 다시 딸의 손을 잡았다. 다시 잡은 손을 살짝살짝 앞뒤로 흔들며 딸과 눈을 마주쳤다. 괜스레 눈치 보던 딸이 조심스럽게 웃는다. 미안한 마음에 활짝 웃어주었다. 뒤를 돌아보니 남편이 터덜터덜 뿔이 난 얼굴로 걸어온다. 잠시 걸음을 멈춰 남편이 가까워졌을 때 스마트폰의 메모를 들려주고 다시 딸과 걸었다. 잠시 후 잰걸음으로 우리의 옆에선 남편은 머쓱한 표정으로 “나도 무안했다고~” 한마디하고 딸의 반대편 손을 잡았다.



  

  부부간 소통의 기술을 이야기할 때,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상대를 비난하지 말고 내 감정만을 전달하는 ‘나 전달법’이라든지, 대화 중 무시하거나 말을 끊지 않고 듣는 ‘경청 기술’ 등을 훈련하도록 한다. 하지만 말이 아닌 글을 통해 나와 상대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소통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쓰기를 통해 내 감정을 쏟아내고 나니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처럼 분노의 수위가 줄어들었다. 상대에게도 필요 이상의 생채기를 내지 않고 이 사안에 대한 나의 감정만을 전달할 수 있었다. 작가 은유는 메모할 것을 말함으로써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을 말하기에 저장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말하기에 저장 기능이 있는 것처럼 쓰기에 소통 기능이 있는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나이 잘 드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