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감지 못해 기름진 단발머리에 허름한 옷을 입은 친구가 있었다. 깡마른 몸에 얇아진 옷감이 펄럭거려도 추레하지 않았다.열 살짜리들에게도 가난은 놀림거리였지만 그 친구를 놀리는 아이는 없었다. 꼿꼿하게 자세를 잡고 앉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발표하는 친구를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한 번은 학부모 참여 수업을 마친 후 선생님을 만나고 온 엄마에게 장난 섞인 잔소리를 들었다. 선생님이 그 친구의 엄마에게는 ‘너무 잘하고 있다, 아이가 똑 부러진다’며 칭찬 일색이었단다. 바로 다음 인사를 한 엄마에게는 내가 ‘썩 잘하고 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며칠을 썩 잘한다는 말로 나를 놀렸다.
당당한 모습에 끌려 친구와 가까워졌다. 친구 집에도 놀러 가게 되었다. 우리 집이 달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인 줄 알았는데, 친구 집은 더 좁은 골목을 구불구불 올라갔다가 다시 어두컴컴한 곳으로 내려갔다. 친구는 대문이 떨어진 네모 틀을 넘어가며 엄마를 불렀다. 친구의 엄마는 간당간당 붙어있는 방문을 열며 나오셨다. 두 개의 방 사이에 할머니 집 대청마루 같은 공간이 판자로 간신히 붙어있다. 친구와 그곳에 앉자 친구 엄마는 날 보며 활짝 웃으셨다가 금세 어두워지셨다. “어쩌나. 마땅히 줄 게 없는데.” 말끝을 흐리시더니 밥과 김, 김치를 내오셨다. 그리고 우리 옆에 앉아 김을 놓고 밥을 얇게 깐 뒤 김치를 올려 둘둘 마신다. 친구는 “와! 김밥이다!”하며 좋아했고, 친구 엄마가 김밥을 썰어 내는 대로 집어 먹는다. 맛있다며 내 입에도 넣어준다.
맛있었다!
분명 김밥을 싸는 모습을 보았다. 김 위에 밥, 그리고 김치 그대로 둘둘 말아 낸 것을 바로 먹었다. 집에 와서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엄마에게 요리법을 꼼꼼히 일러주며 만들어달라 했다. 엄마는 김치만 넣은 김밥을 만들고는 영 시원찮은 내 반응에 알록달록 김밥도 만들어주셨다. 나는 그 맛이 아니라며 엄마에게 ‘썩 맛있다’라고 복수했다. 지금도 친구네 김치김밥을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친구가 더 멋지게 기억된다.
가난하면 불행할까?
그럴 수 있다. 지독한 가난으로 투병 생활을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도 보았고, 열악한 환경이 만든 사고로 어이없이 자녀를 떠나보낸 이도 만났다. 가난이 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라면 행복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돈이 많아 행복할까?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100대 갑부도 보통 시민보다 조금 더 행복한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사회안전망이 탄탄한 선진국일수록 부가 삶의 만족에 미치는 영향은 수치화할 수 없을 정도로 미비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돈 그 자체보다 돈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돈을 중요시할수록 자신의 소득과 관계없이 늘 부족감을 느낀다.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만족할 수 없다.
생존을 위해 돈을 번다. 가끔은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차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딸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딸에게 좋은 것이 꼭 부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채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말해주려 한다. ‘썩 잘하는’ 나는 엄마가 되어 당당하고 똑 부러졌던 친구를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