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수업] 안락함이라는 이름의 정교한 감옥
배부른 소리라는 거 알아요.
남들은 다 부러워하는 직장이고,
조건도 더할 나위 없거든요.
그런데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서서히 질식하는 기분이 들어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조건.
흔히 말하는 '꿀 빠는' 환경.
그런데 그 안에서 영혼이 야위어 간다.
남들의 부러움이 커질수록 죄책감도 비례해서 커진다.
'이런 조건에서 힘들다고 하면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부른 투정이 아니다.
살아 있으려는 자의 정당한 비명이다.
주변에서는 입을 모아 말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직장이 어디 있느냐고.
제발 감사하며 살라고.
이 지점에서 심리적 자기 검열(Self-censorship)이 시작된다.
자신의 실제 감정을 외부의 도덕적 잣대나 사회적 기준에 맞춰 스스로 억압하고 편집하는 행위다.
"이 정도면 행복해야 해." 이 당위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다.
철학자 니체는 낙타의 단계를 말하며
타인의 가치관을 등에 업고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를 비판했다.
세상이 규정한 행복의 조건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 사막을 걷는 낙타.
지금 이 패턴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다.
행복은 조건의 합계가 아니라 상태의 흐름이다.
아무리 귀한 황금 사슬이라 해도 본질은 결국 구속이다.
이 무력감은 환경이 나빠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환경 안에서 자신이라는 존재가 쓰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고여 있는 물은 금그릇에 담겨 있어도 결국 썩는다.
인간에게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욕구가 있다.
매슬로우가 말한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다.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발현하여 될 수 있는 최선의 존재가 되려는 본능적 갈망.
이 욕구는 배가 부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이 해결된 뒤에 더 선명하게 고개를 든다.
카뮈는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자체에서 인간의 존엄을 찾았다.
그런데 지금 이 바위는 이미 정상에 고정되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밀어 올릴 것도, 굴러 내려올 것도 없다.
성장이 거세된 안정은 안락사가 될 수 있다.
안전한 항구에 정박한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은 배가 만들어진 목적이 아니다.
유능함이 갈 곳을 잃어버린 상태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나가면 이만한 데가 없잖아.'
'그냥 참자. 참는 게 현명한 거야.'
지켜주던 울타리가 어느덧 창살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떠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머물러야 할 의미를 상실했기에 괴로운 것이다.
프랭클은 수용소라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은 자만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 패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평온한 수용소에서 의미를 박탈당한 채 말라가고 있다.
지금 느끼는 답답함은 배은망덕의 증거가 아니다.
내면의 생명력이 아직 뜨겁게 박동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다.
안주하고 싶은 본능과 나아가고 싶은 열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
그 긴장이 사라지는 순간, 사람은 정말로 황금 사슬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안정은 삶의 기반이어야지, 삶의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둔 것은 조건이 아니다.
'이만하면 됐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나 자신의 타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