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2022년 3월 초 작성되었습니다.
원래는 사후피임약을 먹은 경험에 대해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그것보다는 페미니스트인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아닌 남성을 만나는 일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19살 때부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나는 인권에 대한 감각이 무딘 사람을 보면 쉽게 분노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 감정은 사그라들었으나 연인만큼은 동일한 가치관을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아닌 D와의 관계는 ‘느리지만 배워나가겠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그때 눈치챘었다. 그의 말에는 ‘느리지만’에 방점이 찍혀있었다는 것을. 이를 눈 감은 이유는 고백 당시의 D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아, 나는 정말 미쳐버린 헤테로가 분명하다.
흐린 눈을 하고 시작된 관계였어도 나는 약속을 지키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것이 내 말에 맞장구 쳐주는 것을 넘어선 대화라든가, 스스로 관련된 콘텐츠를 찾아본다든가,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D는 바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일이 마무리되면 배우기로 시작한다’라는 조건을 하나 더 달았다. 그리고 그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기운을 다 써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만났고, 때때로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한 번은 내가 술에 취해 말했었고 그의 반응에 나는 실망했다. 또 한 번은 다가오는 대선과 관련해서였고 그는 슬그머니 주제를 바꿨다. D가 그럴 때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나와 내 친구들은 이번 대선에 대해 다 같이 절박했다. 다른 세계에 있다는 느낌. 그것 때문에 그가 재밌다고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에 대해 다른 말이 하고 싶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유머코드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들이 쌓여 어제의 통화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나는 ‘무의식적으로’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오늘 글을 완성하기까지 약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이토록 오래 걸린 이유는 이 글의 최종 목적지는 헤어짐이라고 누군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을 있는 힘껏 외면하다가 제대로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 속삭임이 내면의 소리라는 사실을 마주했다. 그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이 솟구쳤다. 그 상태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약속은 언제 지킬 건지 따져 물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며 소리쳤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그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을,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초조해진 나는 헤어지자고 말했다. 진짜로 헤어지게 될지 모르는 채로.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통화는 끝났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나에게 그렇게 지극정성이었던 그가, 한 번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를 않았다. 분노를 품은 궁금증에 미쳐버릴 것 같은 나는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내게 보여줬던 사랑은 다 거짓이었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내 말도 맞지만,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말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정확히 나는 이렇게 물었다.
“페미니즘이 나쁘다는 주장과, 페미니즘이 나쁘지 않다는 주장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어?” 그는 나를 반박할 논리가 당장은 없지만, 어떻게 흑백으로 나뉘기만 하냐고 울먹거렸다.
명문대를 졸업한 그가 집합의 개념을 모르는 가능성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중립이라는 안전지대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게 중립은 방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부장제로 인해 상처받은 내 어린 시절과, 내가 나와 같다고 여기는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방관이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내 아픔을 방관한다는 게…
분노, 슬픔, 원망. 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한편에 놔둔 채 친한 동생인 M을 만났다. 나와 비슷한 취향들을 가진 M이었지만,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나와 달랐다. 그래서 M은 내가 D를 다그칠 때 그가 어땠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M의 말을 들으면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내가 그를 몰아세웠다는 점, 헤어지자는 말을 무기로 그의 가치관을 바꾸려고 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를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다시 전화를 걸었고 그는 약속 장소에 나가는 중이니 나중에 연락하자고 했다. 참을성 없는 인간인 나는 11시가 넘어서도 연락이 없자 전화를 했고, 그는 받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가 말하기를, 나와의 헤어짐을 받아들이려고 술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셔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지호야, 이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니. 우리는 이미 헤어졌잖아.”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비건세상만들기⌟에서는 '남을 재단하지 않는 비건이 되는 방법' 중 하나로 당신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제시한다. ‘당신이 비건이라는 사실만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도 결함 투성이라면 남을 비방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라고 덧붙인다. 나는 현재 소비하는 고기의 양을 줄이는 선에서 노력하는 사람이기에, 엄격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도덕적 격차를 역으로 체감했던 경험을 D와 사귀기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 헤어지는 과정에서 그가 이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를 빌미로 자신의 부진한 노력을 정당화해온 것 같다. 이제와 나는 이 경험을 이야기한 것을 후회한다. 어떻게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노력조차 안 해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여진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 마음을 꾹꾹 접어 쓰레기통에 버려본다.
어쨌거나 사귀는 내내, 그리고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다정했던, 현명하고 단호하게 나와의 관계를 끊어낸 그에게 고맙다. 덕분에 관계의 소중함을 무기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배웠다. 글을 쓰면서 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가 말했듯이 나는 다른 할 일을 잘 해냈던 것처럼 그를 잊는 것조차 잘 해낼 것이다.
* 글의 제목은 핸(인스타그램 @haen___k)님의 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해당 만화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p/CdNmt6iM4oQ/?igshid=YmMyMTA2M2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