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으로 정체화하기
수면장애, 불안장애, 우울장애, 공황장애, 기능성 위장 장애,... '장애'로 끝나는 많은 병을 나는 갖고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정체화해야 하는지, 혹은 그래도 되는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너무 많이 깨고, 너무 오래 잤던 2022년의 가을에 나는 수면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위해서 온몸에 센서를 붙이고 병원에서 밤잠과 낮잠을 자야 했다. 낮잠 검사가 끝난 뒤 한 시간 만에 결과가 나왔다. 결과를 듣는데 웃음이 나왔다. 몇몇 수치가 정상범위에서 터무니없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시간에 10번 이상 깨면 비정상으로 분류되는데, 나는 평균적으로 45번 깼다. 7시간의 밤잠동안 총 300번 정도 깬 셈이다. 내가 깼다고 기억하는 횟수는 9번이었으므로, 본인이 인지하는 정도의 깸과 센서가 잡아내는 깸은 다른 것 같았다. 자꾸 깨서 깊은 잠(3단계 수면)의 비율은 0%였다. 정상범위는 10~12%라고 했다. 낮잠 검사는 짧은 간격으로 소등과 점등이 반복되는 동안 몇 번이나 잠드는지를 체크하는 방식이었다. 총 5번 중 2번 이상이면 기면증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3번 잠들었다.
의학적 기준에 따르면 나는 기면증 환자이기 때문에 정부에 장애인 등록을 신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밤잠의 질이 낮아서 낮잠을 많이 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애매하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생각하는 기면증 환자는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픽 쓰러져 잠에 들어버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면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깨는 이유가 철분 부족일 수도 있다고 해서 처방대로 철분주사를 여러 차례 맞았다. (비쌌다.) 그러고 나서도 효과가 없어서 한약을 반년정도 먹었다. (매우 비쌌다.) 정신과 선생님과 함께 수면 관련 약도 계속 바꿔보았다. 별... 효과는 없었다. 항상 피곤한 삶이 일 년 반 정도 지속되었다. 정신과를 또 한 번 바꿨는데, 드디어 약이 들었다. 새벽 5시쯤 한번 깨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반년이 흐르고 요즘, 2년 전 가을과 비슷하게 자고 깨고 한다. 구내염이 일주일째 낫지 않고 있다는 추가적인 증거를 토대로 오늘 정신과를 방문할 예정이다. 기적처럼 바꾼 약이 단번에 효과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글을 쓰고 있다.
올해 봄에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를 읽었다. 퀴어이론에 관심이 있어서 샀는데, 책의 주된 내용은 페미니즘과 퀴어의 언어로 장애를 조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장애학을 공부해보고 싶었어서 재밌게 읽었다. 알고 보니 장애는 생각보다 더 모호한 개념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정체화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동권과 탈시설화를 위해 싸우는 장애인 운동에 당사자성을 가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차이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장애인 사이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가,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하는 선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을까 생각해 본다. 나열해서 적으려다 빠뜨린 항목이 생길까 두려워 그만둔다. (필시 있을 것이다.) 대신 아픈 몸과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기로 한다. 모두가 아파도 될 권리를 갖게 되기를 바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