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간다고요? 무료 취소인데요?

by 모리

잠자리에 예민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훌쩍 커서 여행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어 버린 지 3~4년 정도 되었다. 아이를 핑계 삼아 나도 여행욕구를 충족할 수 있어서, 연휴가 생기면 어디를 갈지 뭘 할지를 고민하는 일이 즐겁다. 숙소 예약 사이트에 날짜를 넣고, '오, 여기 제법 싼데?'하고 클릭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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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색으로 번쩍이는 문구에 혹해 '지금 예약하기' 버튼을 눌러 들어가면, 내가 본 그 가격의 방은 '시티뷰'라는 이름의 '벽 뷰'이며, 바닥에 캐리어를 펼치면 그 위를 넘어다녀야 할 정도로 좁은 공간인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 방을 보고 있자면, 여행이 아니라 '입관 체험'이 아닌가 싶어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기 일쑤다. 스크롤을 조금 내려본다. 그러면, '관'이 조금씩 넓어진다. 그러다 중간쯤 가면, '오 이 정도면 여행 기분 나겠는데?' 싶은 방을 볼 수 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오션뷰', 욕조도 있어 피로도 풀 수 있고, 차 한 잔 놓고 마주볼 수 있는 미니 테이블도 있다. '오, 그래 여행인데 이 정도는 가 줘야지' 싶어 가격을 보면, 맨 처음 보고 들어왔던 가격의 적어도 1.5배는 뛰어 있다. 그러면 시무룩해지면서도, 어쩐지 상세 사진 보기를 눌러 커다랗고 하얀 침대, 서걱거릴 듯한 흰 이불, 미온수를 채우고 들어가면 일 년치 피로가 풀릴 것만 같은 욕조를 보며 '흠, 그래, 평소 열심히 살았는데 이 정도는 누려도 되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 생각을 모두 꿰뚫고 있는 것일까?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지금 예약하기' 버튼 옆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x월 x일까지 무료 취소가 가능합니다." 흥, 내가 이따위 얄팍한 상술에 당할 줄 알고? 어림없지, 가서 마케팅이니 뭐니 그런 공부나 더 하고 오라고!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달리 내 손가락은 뒤로 가기 버튼이 아니라 '지금 예약하기'를 누르고 있다.


무료 취소, 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은 확실히 도움이 되는 마케팅일 것이다. 어느 인터넷 여행 카페에서 그런 글을 읽었다. 어떤 사람이 무료 취소 가능한 호텔을 두 개 예약해놓고, 그 중 한 곳을 취소하는 것을 깜빡 잊어 몇 십만 원을 날렸다는 거였다. 댓글에는, '나도 그런 적 있다'든가 '날짜를 수첩에 꼭 적어야 한다'든가 하는 자신들의 경험담이 달려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새삼 '자본주의의 마케팅이라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예약 사이트를 보면, 굉장히 저렴하게 올라와 있는 상품이 있는데, 그런 것은 보통 '환불 불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같은 조건의 방이지만 조금 더 비싸게 판매하는 '무료 취소 가능' 상품이 있다. 어느 것으로 할까? 어차피 그날 놀러갈 생각이었으니, 환불 불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여행을 취소하게 될 이유는, 보통 많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거나 갑자기 일이 생기는 경우일 것이다. 이런 것은 상상하게 되면, 장르가 갑자기 변한다. 피크닉 느낌의 옷차림의 주인공들이 스포츠카를 타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명랑한 분위기의 뮤직비디오에서, '아이도 어린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런 일이 저에게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같은 대사가 나오는 어두운 분위기의 보험 광고가 되고 마는 거다.


연휴 계획을 잡다가 갑자기 인생의 다크한 측면을 생각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므로,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듯한' 무료 취소를 선택하게 되는 것 아닐까. (통계 같은 걸 찾아보진 않았지만) 이후 정말로 취소를 하는 비율이 높지는 않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취소할 수 있다'는 마음, 통제권이 나한테 있다는 감각이다. 호텔, 너, 말야, 더 마음에 드는 곳 있으면 언제든지 갈아탈 테니까 잘난 척하지 말고 있으라고, 응?


건강한 자본주의는, 상품과 구매자가 서로 담백한 사이일 때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떤 품목은 상품이 잘난 척을 한다. 구찌니 루이비똥이니 하는 매장에는 높은 사람을 알현하듯 줄을 서서 흰 장갑을 낀 직원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입장한다. 그 모습도 정말 별로지만, 평범한 소비자에게 주도권을 주는 척하면서 상술을 부리는 것도 별로다. 그저, 이 호텔은 얼마야, 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뒤돌아가려는 나를 붙잡고, 마음 바뀌면 취소해도 돼, 라고 귓속에 간질이듯 말하면, 나 같은 팔랑귀는 약간은 의기양양해지고, 손에 주어진 주도권을 어떻게 써볼까, 하면서 몇날 며칠 네온사인 껌뻑이는 밤늦은 유흥가처럼 화려한 사진으로 번쩍이는 숙소 예약 사이트를 포류하며 맑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더 좋은 것이 있을 거야, 여기서 만족하면 안 돼, 그 호텔, 그 방, 오션뷰, 마사지 기능이 있어 관절 닿는 곳마다 물방울이 뽕뽕 나와 전신을 개운하게 해 줄 월풀 욕조가 있는 그곳,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런 곳을 최저가로 갈 수 있어.


왜 더 노력하지 않아? 무료로 취소할 수 있다잖아...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어느새 '엄마, 오늘 저녁 뭐야?'라면서 다가온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있다. "엄마, 이거 먼저 해야 해!" 비슷비슷한 영어 이름의 호텔들, 스위트니 더블이니, 하도 들락날락해서 리뷰까지 다 외울 외우지만 결국은 또 뒤로가고 앞으로 가기를 반복해 어질어질, 그러다 보면 식욕도 없어지고 머슥거리기까지 한다. 온라인에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오프라인으로 넘어온 나는 저녁 준비할 기운이 없다. 호텔 예약도 못했는데 저녁까지 배달하고 있어... 자괴감은 더 깊숙이 파고들지만 나는 다시 노트북을 펼치고 예약 사이트를 떠나지 못한다.


자본주의만 탓할 건 아니다. 리뷰가 2개인 곳보다는 150개인 곳을 선택하고, 굳이 모든 리뷰를 다 읽어보며 '최악입니다'를 찾아내는 나의 집요함이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 둘의 화학 반응이 몇 년 새 나의 여행, 그리고 온갖 소비의 방식이었다. 무료 반품된다기에 산 옷, 막상 사놓고 입지 않고, 리뷰 쓰면 뭐 준다기에 밥 먹는 데 집중하지 않고 폰을 들고 있다. 평소 먹지도 않는 캔 사이다 하나를 위해...


좀 더 정갈하게 살 수 없을까? 새로운 것을 접하며 활력을 얻는 생산적인 여행을 할 수는 없을까? 내 생각으로 내 느낌으로 직접 보고 경험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려면, 모험을 좀 해야 하는데... 오지로 갈 것도 아니면서 그까짓 작은 실패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은 결코 '무료 취소'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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