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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r 23. 2023

비오는 경주




비가 오는 여름, 경주는 짙은 풀 내음과 촉촉이 젖은 녹색들이 펼쳐지는 날들이었다.

높은 빌딩이 익숙했던 서울에 있다 온 경주는 낮아진 건물들만큼 내 마음도 차분히 내려앉았다.

낮은 한옥이 아름답게 있을 수 있는 곳.

한옥 처마 밑으로 비가 아무리 거세게 내려도 여행길 비가 야속하지 않는 곳.

툇마루에 앉아 비 구경하는 게 이렇게 재밌나 싶은 곳.

비가 오는 경주는 그런 곳이었다. 평소라면 야속할 환경도 그것 나름 운치를 주는.


경주에도 수목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침 일찍 가보았다.

비가 오는 아침 수목원은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없을만한 것이 비로 인해 흙으로 된 땅은

푹 젖어 있었고, 걸으며 구경하기에는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 바퀴 돌아보자는 마음으로 우산을 쓰고 걷다 보니

언제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컸는지 알 수 없는 키가 큰 나무들이 보였다.


저렇게 하늘을 향해 높게 솟아 크려면 우선 단단한 몸통과 뿌리가 있어야겠구나.

나무를 보며 시간의 정직함을 읽었다.

나는 아직 땅에 심어져 겨우 땅을 뚫고 나왔을 뿐이구나.

아직 어떤 색의 나뭇잎이 생길지, 어떤 색으로 계절을 보낼지, 어떤 열매들이 생길지,

아니면 열매가 없을지 모를 수밖에 없는 시간이구나.

나는 단단해지기 전에 높이 올라 빨리 나의 색을 알고 싶고, 나의 열매들을 구경하고 싶었구나.

마냥 높아지기만 했다면 나는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견딜 수 있었을까?


여름의 열기가 가득한 곳에 시원하게 비가 쏟아진다.

더 뜨겁고 더 열정적으로 살고 싶지만 평생을 끝없이 열정 가득하게 살 수 없는 인생처럼.

열정의 불꽃에 내가 태워지지 않게, 그 불꽃이 잦아들게 시원하게 비가 온다.

불을 더 크게 키우고 싶은 자에게는 반갑지 않은 비다.

하지만 그 불을 감당하고 있던 뜨거워진 땅과 흙에게는 반가운 비일 거다.


이때쯤 나는 뜨거웠던 마음 불을 끄기 위해 길고 긴 장마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가 그쳤을까 싶을 때 다시 쏟아지고, 비가 안 오는 날에도 하늘은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했던.

그러다 아주 잠깐 햇빛이 비치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아직 장마 기간이라는 걸 알려 주려는 것처럼 길고 긴 비가 내렸다.

우울, 무기력은 비처럼 나에게 쏟아졌다.


이 그림은 숙제처럼 그린 그림이었다.

오키로북스에서 함께한 오그림 원정대로 약속한 숙제를 그린 그림이다.

그리면서 힘들었고, 그리면서 우울했기에 이 그림을 나는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 그림으로 처음 그룹 전시를 했고, 이 그림으로 일러스트 페어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줬다.

한겨울에 한 페어에 여름 그림을 크게 들고 가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사실 액자로 비싸게 해놓은 게 아까워서 들고 갔다.

한참을 서서 보시던 어르신들, 내 또래의 친구들, 나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아이들까지.

모두 이 그림을 보며 시원하다고 했다.

한겨울에 시원한 그림이 좋다고? 정말 생각도 못 한 반응들에 놀라웠다.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의 감정이 잔뜩 묻어있어 나는 괴로운 이 그림이 왜 시원할까.


모두에게는 불이 있다. 그 불은 자신에게 열정이 되고, 힘이 되고 삶의 동력이 되지만

잘못 다루면 큰 산불이 되고 불바다가 되는 것처럼 모두에게는 그런 시기들이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이 시원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지금 불같은 마음이 가득해서 이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다. 그냥 그 시원함이 어디서 오나 나 혼자 생각해 봤다.

이제는 이 그림이 나도 시원하다. 불같이 마음이 화르르 하다가도 이 그림을 잠시 보고 있으면

시원하게 잠시 마음이 진정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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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domjja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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