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가진 질병 중에는 신부전증도 있었다.
신부전증은 주로 당뇨에 의해 발생한다고 한다. 한 쪽 신장의 기능이 서서히 망가지는 질환이다. 신부전증은 신장이식, 신장투석 등으로 치료한다. 아이를 낳기 전, 7년 전 쯤 동생과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다. 아마 이 무렵 '아, 아빠가 지금 보통 환자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듯하다.
신장이라는 게 두 개 있으니 신장을 이식하면 보통 사람처럼 건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이 인생을 편하게 오늘 하루 즐기며 살고 있는 나 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임신을 준비하고 있는 동생의 경우 결정이 쉽지 않았다. 나 역시 아이가 있는 지금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내 하나의 심장은 아이에게 필요해질 수도 있으니.
더 중요한 건 아빠 본인이었는데 우선 이런 논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거절'을 했다. 수술이 무섭고, 딸들에게 이식 받는걸 싫어했다.
아주 가볍게, 별 생각이 없던 나는 인터넷에서 처음으로 '신부전증'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당시 신장 투석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 아빠의 상황에 대해 글을 썼는데 누군가가 내게 이런 댓글을 달았다.
'따님이 이런 마음가짐이라니, 아버지가 무척 외롭겠네요'
그 댓글을 보고 그 날 밤을 새워가며 신장 질환과 당뇨에 대해 검색했고, 나는 많이 울었다.
아빠가 자기 관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아빠는 우울증이었다. 모든 게 무기력해졌기 때문에 자기관리를 할 의욕이 없었던 것 같다. 가끔 낮에 집에 오면 아빠는 아침에 내가 출근할 때 본 모습 그대로 작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러면 나는 방 문 틈으로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내게 우울증 비슷한 감정이 생겼을 때 아빠의 그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저 하루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았고, 내일도 별반 다르지 않을텐데 왜 사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감정들, 그러나 차마 죽을 용기는 없어 삶을 붙들어매고 있는 한심한 나 자신. 어쩌면 아빠도 그런 감정 아니었을까. 나도 그 무렵 늘 침대에 있었는데 아빠와 달리 나는 일이 있었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튼튼한 몸이 있었기에 침대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다시 재기할 만한 생산적인 '일'이 없고, 사람이 떠나간 노년에 몸조차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그 열패감이 얼마나 클지 지금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 무렵 아빠의 방에는 그런 좌절의 기운이 가득했는데, 철없는 나는 그 기운이 내게 올까봐 방문을 닫거나, 집 밖으로 나갔다. 가족이란 그런 게 아닌데 말이다.
아빠가 가장 외로웠을 그 시기에 사실상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큰 딸, 내가 없었다.
어찌됐든 남편을 죽지 않을 만큼 사람구실을 하도록 살려둬야 하는 일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도 피하고 싶었겠지만 피하지 않았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산 시간이 고작 7년 남짓이지만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얼마나 숭고한지 뼈로 느낀다. 이 끈끈한 울타리가 깨지면 삶에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울타리 안에 들어오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울타리 안에 머물기도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이혼이나 가출, 의절 같은 단어가 예능에서 쓰이는 것처럼 그렇게 가볍지 않은 이유다.
대학을 다니고, 매일 도서관에서 학점관리를 하느라어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신림동 고시촌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진로를 바꿔 기자가 되겠다고 취직 준비를 하고, 기자가 되고는 매일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날을 이어갔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가족의 일상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다. 그냥 내가 잘 되면 그걸로 부모님은 다 좋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그러는 사이 부모님은 몸 뿐 아니라 마음까지 병들었다.
집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만을 위해 살던 나는 그 날 처음으로 되도않게 (온갖 집안일에 투입돼 고생하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근엄한 목소리로 당연한 말을 했다.
"아빠가 그냥 투석을 하는 게 좋겠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