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생민은 찬물이다

이 또한 밟고 지나가야 할 과정이다.

by 졔잘졔잘

인간성을 끌어내려야 성공할 수 있는 세상

얼마 전 라디오스타에서 배우 허정민은 "어릴 때 모 학원물 영화 오디션을 보러 갔더니 감독관이 커다란 방 안에 넣고 수많은 지원자들에게 서로 욕을 하라고 지시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수많은 배우 지망생들이 큰 소리로 '애미애비'를 찾는 광경을 보고 놀라서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그의 과거 경험을 맞은편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배우 차태현은 "나도 그런 오디션에 들어가면 못 하고 나올 것 같아"라며 맞장구쳤다.


대사에 욕설이 많은 배역에 걸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서 오디션에 참여한 수맣은 '을'들에게 '서로에게 모욕을 주는 것'을 요구하다니. 서로 처음 본 사람들이 가장 심한 욕을 하거나, 욕을 먹고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승자가 될 수 있다. 상상만 해도 저급하고 잔인하다. 인간성을 얼마나 바닥으로 끌어내려야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쇼'에 불과하다. 이런 일은 연예계 뿐 아니라 현실에도 있다. 대기업 면접장에서 면접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응시자 A에게 "상사가 응시자 B를 성추행하는 모습을 봤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라고 묻는다. 아무튼 허정민이 말한 그 오디션에서 살아남은 배우들이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학원물로 성공한 배우들'이다. 배우들은 잘못이 없지만 결괒거으로 허정민은 이후에도 딱히 그럴듯한 큰 배역을 맞지 못하다 얼마 전 드라마 '고백 부부'에서 인상 깊은 연기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우리는 왜 김생민을 좋아했나



김생민이 20여 년만에 돌연 제1의 전성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다. 내 경우엔 단지 그가 성실하게 아끼고 아껴 잘 살게 된 근면한 캐릭터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허세스럽고 가부장적이기 짝이 없는 방송가에서 매니저도 없이 단벌신사로 출퇴근하는 자신의 짠내 나는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 그저 주어진 일을 감사히 여기는 모습을 존경했다. 유재석, 강호동, 신동엽 등 '화내거나, 놀리거나, 음담패설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남성적인 예능문화에서(혹은 같이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명예 남성이 된 여성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송은이-김숙'이라는 라인을 타고 성공하게 된 모습도 새로웠다. 여성 선배와 여성 후배의 도움으로 밥벌이 외연을 확장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 역시 나는 '미투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남성 연예인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김생민의 미투는 그런 의미에서 '찬물'이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여기자 목소리가 왜 그렇게 여성스럽냐" "여기자는 좀 더 세보여야지"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내가 들었다는 건 아니다... 심지어 예전 여기자는 경찰들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배웠다) 여성스러운 게 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여기자의 성격이 괴팍하지 못하고 상냥하다면 그저 그런 상태로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나름의 장점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성격은 남성들의 가부장적이고 성희롱적이 만연한 문화를 견뎌내지 못한다. (더 남성스러운 여성인) '명예 남성'이 되거나, 성희롱 피해자가 되거나, 여성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아니, 그만 두고 포기하는 한 가지 선택지가 더 있다.


많은 남성들이 미투를 지켜보며 "사회생활하면서 흔히 벌어지는 일인데" "그 시대에는 그게 잘못인지 몰랐는데" 라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때마다 나는 "잘못된 일에 동참해야만 '크게' 성공한다면 '적당히' 살면서 잘못된 일에 동참하지 않고, 혹은 최소 방관이라도 하며 지내는 쪽이 더 편한 거 아닌가"라는 궁금증이 있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윗사람의 행동을 묵과해야 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천천히 올라가면 되지 않나.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성공하는 게 정당한가. 김생민의 등장은 그런 생각을 강화하는 하나의 예시였다. 크게 성공하지 않아도 적당히 지킬 것을 지키며 자신의 일을 하고살아도 괜찮다는 말을 해줄 수 있는 근거였다. (그는 집에서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이마저도 사회와 집을 분리한 나의 패착이다)


나의 분노의 지점은 바로 여기다. 지금의 사회생활이 옳은 방향이 아니라는 또 다른 예시를 찾아야 한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적폐"라는 근거 없는 전제 대신 그렇지 않은 남성의 예시를 찾고 싶었는데 결국 그런 예시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온 김생민이 이 한 가지 사건으로 무너진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그런 안타까운 마음 마저도 2차가해다. 20년 아니라 30년간 성실히 살다 잭팟이 터진 사람이라도 이 혁명에 방해가 된다면 밟고 지나가야 한다. 그가 겪고 있는 좌절은 미투로 피해자들이 입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유시민은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운동권에서 벌어진 페미니즘 담론을 깎아내렸다.

지금이 그 말이 적용되는 시기다. 성평등이라는 거대한 해일이 오고 있다. 그런데 사사로운 안타까움이나 감싸줄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