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빈센조' (2021)
(스포주의_)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의 콘실리에리, 즉 고문 변호사인 빈센조까사노(송중기)는 조직에게 배신을 당하고 한국으로 오게 된다.
어린 시절,
보육원에 엄마가 자신을 맡기면서 곧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끝내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이탈리아로 입양되어 지난한 세월이 흘렀기에 아무리 오랜만에 오는 조국이어도 빈센조에겐 그 어떤 기대나 미련, 설렘 따윈 없었다.
하지만 시가로 1조 원이 넘는 '금'에는 미련이 가득했던 빈센조였다.
한 중국인 갑부가 1조 원가량의 금을 한국에 숨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빈센조에게 부탁을 했고,
빈센조는 허름한 건물을 사서 건물 아래에 오직 중국인 갑부만이 문을 열 수 있도록 보안장치를 설치하여 금을 보관하라는 조언을 해준다.
그렇게 금을 잘 보관하던 중 갑작스레 금의 주인이었던 중국인 갑부는 죽게 되고,
금이 땅속에 묻혀있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빈센조뿐이었다.
비록 조직에게는 배신당했어도, 금은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에!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금가프라자' 앞에 서있게 된다.
하지만 금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바벨 건설이라는 악덕 회사는 당장이라도 금가프라자를 허물고 재개발을 하려 하고,
금가프라자에 남아있는 마지막 상인들은 재개발을 허하지 않으며,
바벨 건설과 상인들 사이에는 매일같이 대환장 난리가 나는 곳이었다.
바벨 건설도, 상가 사람들에게도 들키지 않고 금을 꺼내는 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 판단한 빈센조는 마음만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당장에라도 금을 빼내고 싶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그런 와중에 바벨의 계열사 중 하나인 바벨 화학은 엄청나게 강한 마약성 약품을 일반 약처럼 조작하여 시중에 대규모로 판매하려 하고,
그것을 막는데 가장 선봉에 선 '지푸라기'의 변호사 홍유찬변호사(유재명)는 바벨 화학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딸인 홍차영(전여빈)은 각성하게 된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적당히 속물적이고, 약자보다는 강자를 대변하는 변호사였기에 항상 아버지와 다툼이 있긴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선 차영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대변하고 있던 바벨 화학에 의해 아버지가 철저하게 죽임을 당한 걸 알게 된 차영은,
죽음의 진실과 더불어 바벨 그룹의 모든 악행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지푸라기'의 변호사가 되어 약자의 편에서 강자를 상대하길 자청하는 차영이었다.
그리고 빈센조에게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매일 명품을 입고 다닐 정도로 그 어떠한 아쉬움도 없어 보이는 이탈리아 변호사가 다 허물어져가는 허름한 금가프라자에 그토록 애정과 관심을 쏟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차영이었다.
차영은 빈센조에게 자신이 바벨 그룹을 상대로 어떠한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게 도와준다면,
빈센조가 금가프라자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그 둘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일종의 전략적 제휴를 맺게 되고 강자를 향한 싸움을 시작한다.
그런데 빈센조가 여타의 작품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선악의 구분이 명확히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악행을 저지르는 쪽을 매우 극악무도하게 설정한다.
그로 인해 약자를 철저하게 짓밟고, 다시는 약자가 강자를 상대할 수 없게 그들을 최대치의 공포로 몰아넣는 설정을 하기에 약한 쪽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좌절과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럼으로써 약자를 더 약해 보이게 하고, 그렇지만 결국엔 그 어떤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고서도 약자는 승리한다와 같은 플롯이 주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아니었다.
물론 극의 특성상 바벨 그룹의 회장 장준우(옥택연)와 그를 돕는 변호사 최명희(김여진)에 의해 아주 많은 등장인물들이 죽고 다치긴 하지만 결코 그들이 원하는 대로만 극이 진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빈센조 때문에 바벨 그룹과 최명희변호사 측의 계획이 틀어지고, 난처하게 되는 상황들을 자꾸 보여줌으로써 악인, 그리고 거대한 힘을 가진 쪽을 철저하게 농락하고 가지고 노는 스토리를 보여준다.
또한 이 작품은 결코 약자를 나락에 빠트리지 않는다.
'금가프라자' 그 허름한 건물에 입주한 상인들을 거대한 힘을 가진 이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약자로 설정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소상공인처럼 보였지만, 그들 모두는 아주 내실이 단단한 사람들이었다.
하나씩의 특기와 능력을 가지고 과거에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었고!
결코 금가프라자를 속수무책으로 뺏기게만 두고 보지 않는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그로 인해 악의 무리가 온갖 횡포와 훼방을 놓아도,
금가프라자의 보통 사람들, 상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연대하며 힘든 시기와 상황을 헤쳐나가는 용기를 보여준다.
그래서 약자 내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더 어렵고 곤궁에 처하는 모습들로만 그리지 않은 것이,
보통 사람들이 모이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보여준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특별한 점이라 생각한다.
악당을 물리치는 것이 큰 주제이자 줄거리인 작품들을 부쩍 많이 볼 수 있다.
열혈 사제나 모범택시처럼 말이다.
빈센조 역시 위 작품들과 비슷한 결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빈센조가 다른 작품들과 다른 조금 더 특별한 점이라면, 악의 무리를 심판하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빈센조는 자기 스스로를 악당, 쓰레기라고 일컬었으며, 사람들과 세상에 해를 끼치는 악당을 처리하는 것에 서스름이 없었다.
'악은 악으로 심판한다.'가 그의 기조였다.
또한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방식 또한 단순히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고통 없는 죽음은 악을 처단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관용이라 표현할 만큼이었다.
이러한 마인드가 최고조가 되는 회차가 16화부터였던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바벨 그룹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다치게 하거나, 곤경에 처하게 해도, 굳이 먼저 나서서 어려움들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의 무리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당해주거나, 기다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16화의 엔딩부터는 달랐다.
오래전 빈센조의 어머니가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고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는,
그 당시 어머니가 큰 병을 앓고 있었기에 자신을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서 차츰 어머니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마음이 열리는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아프신 어머니에게 자신도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했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려고 진심으로 용기 내어 다가가려는 순간.
그래서 드디어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된 그날.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서 마주한 건 차갑게 식은 어머니의 시신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장준우와 최명희의 계략이었고.
빈센조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빈센조의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이제야 애틋하게 서로에게 마음을 표현하려던 두 모자를 처참히 갈라 놓은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빈센조는 드디어 눈이 돈다.
몇십 년 만에 만난 엄마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에 빈센조는 가슴이 미어지고 더 이상의 관용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악당들을 찾아가 경고한다.
'내 원칙이 하나 있거든.
고통 없는 죽음은 축복이라는 것.
앞으로 너희에게 두 가지를 줄 거야.
죽음보다 더한 수치심.
그리고 고통의 단계를 천천히 느끼는 죽음."
이렇게 경고만 한 뒤, 오늘도 빈센조는 결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애피타이저는 있어야겠지 않냐며 장준우의 귀에만 살짝 총질을 하는 빈센조였다.
그리고 그들을 아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장준우와 최명희는 "그냥 자신을 빨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어떤 죽음보다도 고통스럽게 복수를 선사하는 빈센조를 보며 아주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는 주제의식.
그리고 고통 없는 죽음은 축복이라는 큰 틀에서 빈센조는 20화 내내 악의 무리들과의 밀당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이런 익숙지 않은 서사에 사실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법이 아닌 한 개인이 개인을 처단하는 것이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고, 그러한 잔혹한 복수를 보며 불편한 마음이 한 켠에 계속 있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법은 절대 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빈센조가 함으로써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럴 때 보면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악을 악으로 처단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드라마라는 창조적 공간에서 한 번쯤은 악당을 이렇게 다루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 작품에서처럼 악당들은 그 아무리 극악무도한 짓을 해도 적당한 법과 원칙을 들이밀며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기에 법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에 공감했다.
또 왜 항상 약자의 죽음과 곤경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악당이 결국 죽임을 당하거나, 복수를 당하거나, 법의 처벌을 받는 것에는 그렇게 관대한 것인지.
피해자가 받은 고통은 어느새 잊고, 엄격한 기준과 잣대를 들이밀며 악당에게 가해진 처벌이 적당한가? 죽임을 당하는 게 당연한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물론 현실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긴 하지만, 드라마라는 가상공간에서 빈센조가 악인을 처단하고 응징해 줌으로써 통쾌하고 속 시원히 해소되는 무엇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결코 주인공이 악당을 처단했으니 착한 사람이라는 당위성을 부여하지 않은 점.
빈센조 자기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는 무슨! 난 쓰레기 치우는 쓰레기야. 난 나보다 더 악취 나는 쓰레기는 도저히 참지 못하거든."
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빈센조를 난세에 나타난 영웅처럼 찬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
이러한 점들이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감히 이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악을 악으로 심판하는 것도.
스스로를 악당이라고 표현한 것도.
선악의 대결 속에서, 적당한 코믹과 훨훨 나는 액션도.
한 번쯤은 아무 생각 없이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하지 않고 악인을 악인으로써만 대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난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