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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hbluee Dec 06. 2024

빈 트랙 위에서

천천히 걸어가기

 같은 곳을 향해 달리다 보면, 늘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한 걸음, 두 걸음 뒤쳐지다 보면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다.

그러다 보면 처음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 설레임과 희망찬 목표 같은 것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꾸만 내 빈 옆자리. 빈 트랙만 지켜보게 된다.


 가볍던 몸은 무거워지고 서서히 속도가 느려지고 자신감마저 사라진다.


그다음은?


이제 멈추어 서서 영원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끄적이는 걸 좋아했다. 그게 너무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내게 회사에서 쓰다 남은 이면지를 묶어서 연습장처럼 쓰게 주셨다. 커다란 달력도 뒷장은 다 내 몫이었다. 어린 나는 맨날 그렇게 배를 깔고 드러누워서, 꼬물꼬물 조그만 손으로 끄적끄적거렸다. 너무 재미있어서 목마른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몰라서, 입술이 말라 혀를 내밀어 적셔가면서 하루종일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빠져 지내곤 했다.


 내 키가 한 두 뼘 더 자라자 어른들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 잘 그린다. 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내 그림 솜씨가 제법 눈에 띄기 시작했나 보다.

그러면 나는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곤 했다.

"만화가요!"

그때는 정말 그게 진심이었다. 

그 대답을 하는 순간에도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하얀 연습장. 그게 내 전부였다.


 어느새 어엿한 교복을 입는 언니가 되었다. 그때도 늘 만화책과 연습장은 내 가장 친한 친구였었다. 이제 제법 학교에서 유명해졌다. 제일 잘 그리는 애. 학교 아침 조회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그림대회 상을 받기도 했었다. 

 수채화 물감을 사서는 혼자서 끙끙대며 그렸다. 만화가 '이은혜'와 '김진'의 작품을 보고 수채화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만화 잡자의 그림 그리기 '팁'이 내 스승이었다. 용돈을 모아 비싼 수채화용지를 사서 좁은 내 방 안에서 밥상을 펴고 그 위에 올려놓고 하루종일 고개를 굽어대고 그림을 그렸다. 나는 확실히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꿈을 어떻게 펼쳐야 할지 몰라서 그냥 방 안에서 그렇게 그림만 그렸다. 내 그림을 사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연말이 되면 수채화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팔기도 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고 난 그게 너무 좋았다.

사진: UnsplashMarkus Spiske


 그렇게 자라나 어른이 된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내 그림이 어떤 친구의 눈에 띄이면서 벌어진 일을 시작으로, 이제 그림 그리는 일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자, 생각지도 못한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이 세상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들 중에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여태껏 뛰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날아가고 있었다.


제일 잘 그리는 애.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어도 ,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처음 맛보는 좌절감. 

내게는 유일했던 재능이었는데.

이제 나는 더 이상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그림을 보고, 만족스러워하지 않고, 지적하고, 때로는 화를 내고...

나는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상처들을 이겨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당황스러워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다 큰 어른이 애기처럼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비난을 받았다.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다.

조금씩 성장하며 배워온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경험이 풍부했다. 

나만 마음의 준비를 해 볼 새도 없이 칼바람 같은 낯선 비난에 무수한 생채기가 생겼다.


 그림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알량한 자존심만 세우다가, 서서히 그 자존심마저 처참하게 무너뜨려야 했다. 

 그저 재능만으로 여기까지 온 나의 한계였다. 그걸 인정하기가 많이 힘들었다. 


상처를 주고받는 게 당연한 일상이라 여겨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나 유약했다.


남몰래 울고 질투하고, 모자란 나 자신을 원망했다. 왜 강하지 못해. 너는. 왜 이리 유약한 거니.

사진: UnsplashAmritanshu Sikdar


 제일 잘하는 일이었는데 제일 노력해야 되는 일이 되어버리고 나서,

그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나는 주저앉았다.


그렇게 빈 트랙 옆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바람을 쐬며 지켜보니..

텅 비어 보였던 트랙에 아직도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앞이 휑한데도 그 사람들은 차분히 달리거나 혹은 걸어갔다.

나중에 그 사람들은 결국 저 멀리 앞서갔다.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가만히 몸을 세워서 조금씩 내 트랙에 들어가서 살살 걸어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돌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또 주저앉다 보니 이제 그 사람들이 새까매져서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다.

그러나 연필을 들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찌리릿 저리다.

패배한 듯 나락에 떨어진 기분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서릿발 같은 슬픔이 가슴 깊이 스며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그림을 좋아했었는지 자꾸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누군가도 내게 느꼈을 거대한 재능의 벽 앞에서

그것을 뛰어넘는 중요한 이유를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어째서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이 되었는지 다시 생각해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그것밖에는 없었는데 다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이 없는 기분

사진: UnsplashNicola Anderson




예전에는 내가 한심했다.

바보같이 느껴졌지만

이제 또 다른 수단인 글로서 나를 보듬어 본다.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다시 일어섰으면 좋겠다.

내가 스스로를 주저앉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계속 생각하고, 글을 쓴다.

자꾸 나를 깨우기 위해서, 일어나라고 보듬어주기 위해서.

내가 힘이 들 때, 나를 위로해 주었던 그림이라는 친구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내 안에 남아있는 에너지를 스스로 채워보기 위해서.


입만 살아남아 둥둥 뜨더라도 계속 떠들어보려고 한다.


언젠가는 그 말들이 내 몸을 일으켜 세워주겠지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조금씩 회복하면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아. 이쁘다~~ 이쁘다~~ 해주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내 트랙의 결승선도 가까워지겠지.

더 늦기 전에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걷자. 걸어보자.


다시 그저 즐거웠던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

사진: UnsplashSenjuti Kundu






어쭙잖은 이야기 하나 하자면

원래 잘하는 사람들이 더 쉽게

질투를 하고요

더 쉽게 수렁에 빠지더라고요

제 잘난 맛에 살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겸손하게 천천히 가는 거예요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해 보는 거예요

일단 저는 그러려고요

귀엽게 봐주시렵니까


종알종알 맨날 지 얘기만 하고

그래도 어쩌겠어요

저는 요런 글쟁이인가 봅니다


그래도 제 솔직한 고백 보고,

저와 주파수가 닿아 공감하고

위로받으시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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