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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Feb 27. 2024

이끼

언제나처럼 아침 산책 중이었다. 늘 다니던 길이었는데 무언가 평소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무 아래 잔디밭이 온통 푸른 이끼로 덮여 있었다. 두툼한 이불을 덮은 것 같았다. 언제 이렇게 생겼지? 겨울이 한 꺼풀 꺾인 2월의 중순, 비가 오고 난 후 습기를 머금어서인지 유독 채도 높은 연둣빛이었다.


이끼를 보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2006년에 National Geographic Traveler에서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으로 가장 방문하고 싶은 섬 1위에 Faroe Islands가 꼽혔다. 이때 본 사진 한 장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온통 이끼로 뒤덮인 지형과, 지붕마저 이끼로 덮인 알록달록한 단층집들.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이곳을 방문하리라. 밤늦게 회사에 남아 야근할 때면 종종 페로제도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비행기표를 찾아보고,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를 낯선 단어를 읽어보고, 동선을 그려 보고, 며칠 휴가를 내야 할지, 아니 그냥 퇴사하고 일 년간 살아볼까, 장기 임대할 수 있는 주택이 있을까, 마음은 이미 여행 중이었다.


실제로 방문한 것은 2013년이었다. 회사 일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였다. 가기 싫은 해외 출장에서 막 돌아온 때였다. 그날도 새벽까지 야근을 하다가 인터넷을 좀 뒤적이던 차에, 캐나다 옐로나이프의 오로라 관측 여행기가 눈에 띄었다. 캐나다, 비아레일, 재스퍼, 북극, 북극곰. 미칠 듯이 추울 것이 뻔한 극지방의 겨울, 당장 그 매서운 추위와 어둠 속을 걸어 다녀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북극과 사랑에 빠졌다. 당장 가지 않으면 시름시름 말라죽을 것만 같았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회사에 통보하고 길고 긴 우여곡절 끝에 정말 퇴사했다.


퇴사를 하자마자 한눈에 반했던 나의 열병 같은 사랑은 기억도 없이 사라졌고, 짐을 챙겨 제일 먼저 간 곳은 페로제도였다. 코펜하겐으로 가서 페로제도행 비행기를 탔다. Vágar 섬에 있는 공항에 내려, 여기서 300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면 수도인 Tórshavn에 도착한다.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버스가 비행기 도착 시간에 맞추어 기다렸다가 잊지 않고 승객을 잘 챙겨간다. 아름다우면서도 위협적인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극지방 국가 특유의 배려이다. 이 300번 공항버스가 달리는 길은 비싼 가격의 excursion course와 동일하니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즐기면 된다. 사실, 페로제도 내에 국도가 여러 갈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눈이 닿는 모든 곳이 그림과 같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페로제도가 너무나 인상적이고 사랑스러워서, 나중에 같이 일하게 된 북유럽 친구에게 따지듯 물었다. 너는 자유롭게 페로제도에 가서 살 수 있잖아, 왜! 어째서! 페로제도에 가서 살지 않는 거야? (Nordic Council 소속 국가가 아닌 다른 EU국가 거주민은 비자가 필요하다.) '거기에선 직장을 구할 수 없는데?' '원격 근무 하면 되잖아! 내가 너라면 당장 페로제도로 가서 살 텐데!' 그 친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복지국가 사람들의 나태함이 싫다고,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을 사랑하여 런던으로 이주한 그 친구에게 오로지 자연밖에 볼 게 없는 페로제도로 가라니 어처구니없긴 했을 것이다.

 

오늘 아파트 단지 내 잔디밭을 덮은 이끼는 딱 페로제로의 색을 닮았다. 흐린 날씨 역시 그곳의 물안개를 떠오르게 한다. 아직 겨울인데, 헐벗은 나무 아래 온 땅을 녹음이 가득 뒤덮고 있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렇게 가까이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 있었는데, 왜 나는 한 번도 이 이끼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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