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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Jul 30. 2023

우아한 휴가

내 고향 강원도 

휴가였다. 아이 유치원 방학에 맞춰서 내 고향 강원도 고성에 가겠다는 게 휴가 계획의 전부.

고성에 큰 고모댁에서 며칠 지내고 바다 보고 와야지. 딱 이 정도의 계획을 가지고 운전대를 잡았다. 

코시국이 끝나고 해외로 휴가를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들 해서 고속도로에 차가 적을 줄 생각하건 경기도 오산이었다. 휴가 때 움직이길 싫어하던 사람들도 이번 여름엔 작심하고 쏟아져 나왔나 보다. 

돈 쓰고, 시간 들여, 체력 긁어모아서 불태우고 오는 시간. 어딜 가도 에어컨 나오는 집에 있는 것보다 고생이 지만 우리는 그 고생을 우아하게 휴가라고 불러왔다. 

그 우아한걸 우리 집도 하게 된 거다. 

이번 휴가가 특별했던 건 남편도 함께 가게 되었다는 것. 백혈병 투병 이후의 남편 체력과 컨디션은 예전 같지 않아서 무리하게 되면 여행 기간만큼 병원신세를 지게 될까 봐 늘 부담이 컸다. 

(실제로 이박삼일 여행 후 일주일 입원 한 적이 있다)

남편을 위하는 마음보다는 집이 아닌 곳에서 까지 남편의 컨디션을 살펴주며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내 이기심이 컸다.

아가씨가 떠나는 휴가는 순한 맛, 아이와 함께 하는 휴가는 매운맛, 환자와 함께 하는 휴가는 죽을 맛 이 아닐까. 육아모드와 간병모드를 장착한 휴가라... 반납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긴장이 높은 채로 고모댁에 도착했다. 이번 휴가의 절반 이상의 성공은 고향인 강원도로 간 것이었다는 걸 짐을 내리면서 깨달았다. 내가 자란 곳에 거대한 자연이 주는 위로가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게 고마웠다.

동네는 아직도 구멍가게 하나 없고, 버스 배차가 하루에 5대뿐인  산골 마을이다. 집 앞 사방이 산이고 논 밭.

밤 이면 선명한 북두칠성이 그려진 하늘이 지붕이 되는 그런 동네다. 

낮에는 사람 찜 쪄 먹는 더위에 움직일 수가 없고 해가 다 넘어간 밤에 근처 바다에 발을 담그러 나갔다. 

바닷물은 짜릿하게 차가웠고, 걸을 때마다 보드라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채워져 올라왔다. 파도와 함께 내 손을 잡은 아이의 까르르르 웃는 소리가 부서졌다. 적당한 어둠이 투병으로 지치고 마른 남편의 얼굴을 가려주고 늘 불안이 높은 엄마 곁에서 야금야금 그 불안으로 배를 채우던 아이의 표정을 덮어줘서 그 순간이 빈틈없이 좋았다. 시력이 안 좋은 연예인이 자기는 굳이 안경을 쓰지 않고 보이는 만큼만 보며 사는 게 편하다고 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땐 뭐야 저 사람 엄청  대충대충 사는구나 했었는데 지금 보니 현자였다. 

그래 나도 돌아가면 보이는 만큼만 보자. 애써 미리 보려고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걸 보이는 것처럼 살지도 말고. 내 마음이 힘을 모아 애써서 모든 걸 보고 싶어 할 때, 셋이 함께 걸었던 밤바다를 생각해야지. 

한 사람을 만났는데, 셋이 되었고 우리는 지금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작은 돌부리에도 자빠질까 한걸음도  무서운 쫄보들이 손 잡고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매일을 보내다가 밤바다를 걷는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다. 거창하게 손가락은 걸지 않았지만 보이는 만큼만 보자고 또 웃으며 숨은 쉬며 살자고 약속한 것 같이 마음이 든든해졌다. 

낮에 고속도로에  쏟아져 나왔던 이들은 어디에서 우아한 휴가를 보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부디 그들도 일상에서는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미처 생각지 못한 일에는 무릎을 탁! 치는 깨달음이 있길.

그리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서는 한걸음 조금 더 가벼워 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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