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끝까지 걷지 못했다

by 무심
언니, 나 이제 못 걷겠어


제주도 여행 이후, H의 세계는 급격히 좁아졌다.

반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나는 요양원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서로의 치료 일정이 겹치지 않는 선에서 종종 만나 산책을 이어갔다.

하지만 H의 기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고, 함께 걸을 수 있는 거리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집 근처 산책길을 걷는 것조차 버거워, 정했던 코스를 다 못 걷고 돌아오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날은 더 심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언니, 나 이제 못 걷겠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봄이 막 시작되려던 때였지만, H의 봄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산책길이었다.


진짜 마지막 만남은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였다.

집에 와 달라는 그녀의 말에 찾아갔을 때, 여러 장의 문서가 어지럽게 흩어진 테이블 앞에 초점 잃은 눈으로 앉아 있었다.

개인연금 내역, 보험 증서, 은행 통장들…. 진단 이후 차일피일 미뤄두었던 재산 정리였다.
그동안은 미래의 문을 닫는 것 같아서, 손을 대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앙상한 손으로 흩어진 종이들을 두서없이 넘기다가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
“부모님 모시고 사는 동생에게 더 많이 주고 싶어. 다른 형제들도 이해해 주겠지?”


마지막 순간 그녀가 놓지 못한 것은 자신의 병이 아니라, 남겨질 가족들의 삶이었다.

슬픔 대신 현실적인 도움으로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었던 마음.

그 적막한 이별 준비를 바라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H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건 내가 들은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되었다.
“언니, 그동안 고마웠어. 잊지 못할 거야.”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나도 너를 잊지 못할 거야.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목소리는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쏟아지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까지도, 이것이 정말 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 후 그녀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두 달 남짓 지난 어느 오후, 그녀의 부고가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