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항암으로 온몸이 비명을 지르던 그해 4월, 암 투병을 함께하던 내면의 단짝 H가 그렇게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내 미래 위로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 같았다. 슬픔보다 무거운 공포가 밀려왔다.
석 달 뒤에는 치매로 고생하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졌다.
봄에 H를 잃고, 여름에 아버지를 여의고 나니, 새까만 어둠이 나를 에워쌌다.
그 해, 나는 ‘죽음’의 영역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세상은 유채색으로 빛나는데, 나만 홀로 무채색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종일 누워 지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끊임없는 상념과 자학이 나를 몰아세웠고, 3주마다 돌아오는 항암치료에만 어쩔 수 없이 문밖을 나섰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어느 날, 가족의 모습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은퇴를 앞둔 나이에 가사와 돌봄을 책임지는 남편의 지친 어깨, 사회초년생으로 고군분투하는 딸, 취업을 준비하는 아들의 불안한 뒷모습.
나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
그 사이 가족들도 함께 아팠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오랜 동굴 속에서 벗어나 무채색의 방 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아픈 사이, 감정을 안으로만 삼키던 남편이 나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딸이 가끔 신경질을 부리며, 아들은 뭔가 요구사항이 많아졌다.
그런 요즘이 좋다.
이 평범한 소란 속에서, 일상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좋다.
아직도 문득문득 H가 스며든다.
나는 그녀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오늘을 살고 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지금의 풍경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길을, 나는 오늘 걷는다.
그동안 H와 함께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