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포문을 여는 텍스트의 유입
막상 글쓰기를 하려고 앉으면 백지상태로 멍하게 시간을 흘려버릴 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는 분들의 경우, 더욱 막막함을 느끼게 되지요. 글쓰기 초입에서 어떻게 지면을 채워나갔는지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개인적으로 영어 필사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맨땅에 헤딩하듯 완전한 백지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창조란 완전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무중생유(無中生有)’아니라 기존의 아이디어를 재조합하여 탑을 쌓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요? 글쓰기도 그렇게 시작하면 됩니다.
매일 조금씩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영어 원서를 읽어 가던 때였습니다. 천천히 텍스트 속의 영어 단어와 구문을 정리하고 생소한 지명이나 인물 등 배경 지식을 검색하면서 텍스트 속의 인물, 사건, 배경에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마음을 두드리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다 보면 내면의 소리와 맞닿는 지점이 꼭 생겨납니다. 마음에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뭐 하나는 꼭 튀어나오더라고요. 냉큼 낚아채어 단상을 끄적였습니다. 이미 차려져 있는 글쓰기 재료들을 여기저기서 주워 연결만 하면 되는 셈이었어요. 그렇게 샛길 활동으로 선택한‘단상 쓰기’가 글쓰기의 루틴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그리 거창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글 문을 열기만 하면 흐름을 타게 될 때가 많으니까요. 물꼬를 틀어주는 비결은 바로 텍스트의 유입입니다. 순전한 나의 힘만으로 포문을 열기 힘든 경우, 남의 글에 기대어 나의 글을 써보는 것이지요. 머릿속에 떠다니는 사고(思考)의 뭉치들에 활자를 입혀보는 과정 자체가 큰 의미를 남깁니다.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갈 때는 몰랐던 생각에 모양과 색깔을 넣을 수 있거든요. 길지 않고 단 몇 줄이라도 좋습니다.‘그저 한 줄이라도 쓰자.’라는 결심이 눈덩이 효과처럼 두세 줄, 한 단락, 나아가 한 편의 글에 도착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다른 이가 쓴 글에 잠겨, 개인적인 사유를 버무리는 시간이 쌓이다 보면 결국 글을 쓰는 근력도 다져집니다.
흔히들 글을 쓰기 위해서 글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읽기는 작가의 숨결이 담긴 텍스트와 마주하며 글쓰기의 마중물을 붓는 과정이 되어주기 때문이에요.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다는 명제는 지극히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렇다고 책만 많이 읽어서 글을 잘 쓰게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글을 쓰는‘노동’의 시간이 고여야 제대로 된 아웃풋이 나오게 됩니다. 글쓰기는 신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재능만의 영역이 아니라 미련하게 정도(定道)를 거쳐야 하는 노력 값이라고 해야 할까요. 위대한 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해요.
“글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타자기 앞에 앉아서 피를 흘리는 것이다.(There is nothing to writing. All you do is sit down at a typewriter and bleed.)”
결국, 진정한 글쓰기는 꾸역꾸역 써 내려가는 피땀 어린 시간의 축척입니다. 시간의 공을 들인 글에는 생각이 담깁니다. 좋은 글들은 좋은 생각을 끌어들이기도 하고요. 고로, 사유의 부재(不在)를 자극하는 데 좋은 글 만한 재료가 없겠지요.
개인적으로 박노해 시인의『걷는 독서』가 사색과 글로 연결되는 출발지가 되어줄 때가 많았습니다.『걷는 독서』는 삶에 대한 시인의 시선과 통찰을 짧은 문장에 담아 직접 찍은 사진과 곁들여진 전시회 같은 책이에요. 원어민의 감수를 받아 시인의 글 아래에 영문 번역이 함께 실려있습니다. 단 한 줄의 문장에 어찌 그리도 깊은 생의 진리가 흘러나올 수 있는지 감탄을 연발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 한 문장이 무수한 경험들을 길어내는 강력한 힘으로 인해 기억을 더듬으며 삶에 적용한 글과 생각을 덧붙여 글 한 편을 뚝딱 쓸 수 있습니다. 긴 호흡으로 책을 읽을 여유가 없다면 『걷는 독서』와 같은 명언집이나 짧은 인생 글들의 모음집을 활용해 보세요. 좋은 글은 글쓰기의 단초가 되어줍니다.
‘서평 쓰기’ 역시 단상 쓰기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감을 떠올려 내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내고, 책의 내용을 소화해서 정리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정여울 작가의 『끝까지 쓰는 용기』에서도 서평은‘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느끼는 신인들에게 가장 좋은 글쓰기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서평으로 원고료를 받으며 글 쓰는 사람으로 데뷔를 했고요. 이러한 배경 지식조차 전무(全無)했던 글쓰기 초기 단계에 서평을 병행하며 글쓰기의 단추를 끼워갔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쓰는 작업은 가볍지 않은 시간과 공이 들어갑니다. 내용을 정리하고 재구조하며 삶에 적용하는 종합적인 사고 활동이거든요. 그만큼 마음에 들여온 정보를 내 것으로 전환하여 글쓰기 연습을 할 수 있는 최적의 도구가 아닐까 싶어요. 단상 쓰기에서 출발하여 서평 쓰기로 나아가는 과정은 글쓰기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단단한 글 습관의 토대가 됩니다. 엉켜있던 생각의 매무새를 만지고 글 연습을 하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되어주지요.
♠ 가볍게 글의 포문을 여는 방법 ♠
글쓰기 시작의 구간에서 머리를 쥐어짜고, 아무리 닦달하여도 뱉어지지 않을 때가 있지요? 무(無)에서 시작하지 말고 유(有)에서 글을 풀어내기 시작해 보세요.
1. 우선, 글이 안 써지면 책을 읽어보세요. 다 읽고 서평을 쓰면, 멈추었던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2. 책을 읽을 때 천천히 깊이 있게 단어와 문장 옆에 서 있어 보세요. 필사를 통해 잠시 머물다 보면 사색이 따라옵니다. 단상 쓰기를 이어서 해볼 수 있어요.
3. 명언 하나를 찾아, 이를 일상과 연결하여 간단하게 단상 쓰기로 연결해 보세요. 글을 길어 올려주는 마중물이 될거에요.
☛ 글쓰기를 할 때 서론, 본론, 결론의 완벽한 구조와 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세요. 꾸준하게 글쓰기의 물결 위에 찰방대는 일상, 그 견딤과 지속이 중요하니까요. 쓰고자 하는 동력을 하염없이 기다리기 전에 쓸 수 있는, 그리고 쓰게 만드는 디딤돌 위에 올라서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