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교과 사교육 금지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기회

by 위혜정

"둘째는 누나가 다니는 학교 안 가겠대요."

"왜?"

"누나처럼 시험 많이 보기 싫대요."


첫째 딸을 서울 사립 등학교 보내고 있는 지인이 있다. 코로나 이후 입학 경쟁률이 치솟은 사립 초등학교들은 선지원을 받아 무작위 추첨을 통해 입학생을 결정한다. 1, 2, 3 지망까지 지원 가능하다 보니 경쟁률이 높아서인지 면접이나 시험 등의 선발과정은 생략되고, 공평해 보이는 듯한 확률 게임으로 정원을 채운다. 30~40분가량 노란 스쿨버스를 타야 하는 원거리 등하굣길을 감수하고도 많은 부모들의 선택을 받는 사립 초등학교들은 학력 관리형 엘리트 교육 측면에서 단연 공립학교 보다 우위를 선점한다. 가고 싶다고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인의 둘째 녀석이 희망교에서 사립초를 지워낸 핵심적인 이유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쪼꼬미가 미래를 꿰뚫는 명석함이 있다.


학교에서 시험을 자주 보는 것은 둘째 치고, 시험 문제도 까다로워서 학원을 다니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 배운 부분에서 출제가 되지 않는다는 얼토당토않은 현실 앞에 선택은 하나, 학원행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사교육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당위가 보충학습이 아닌 심화학습으로 넘어간 지도 오래다. 일부가 아닌, 모두가 그래야 하는 상황이 안쓰럽다 못해 씁쓸하다. 어려운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불안함을 줄이기 위해, 모두가 그러니 뒤처지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학원을 뺑뺑 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 의존형 학습에 발을 디디면, 고등학교 때까지 끊어내지 못하는 게 함정이다.

학기 초, 상담을 할 때마다 하는 것이 있다. 학생들의 일과 점검이다. 공부를 아예 포기한 학생을 제외하고는 신기하리만치 획일화되어 있다. 오후 5시경 하교 후, 주중은 물론이고 주말까지 학원스케줄로 꽉 차있다. 도저히 자기 주도 학습을 할 틈이 안 보 혼자 할 수 있는 과목은 학원 의존도를 덜어내도록 권면하지만 허공에 날아갈 말이라는 것도 이제 안다. 학생도, 학부모도 학원 없는 일과를 살아본 적이 없다.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하는 용기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다.


신기한 것은 학원 의존도가 학업성취도와 무관하다는 점이다. 성적이 높은 학생들조차도 학원 강사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뭍은 자료를 얻기 위해, 엄격하게 조성된 학습 분위기 속으로 쉽게 들어가기 위해, 혹은 남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가기 위해 학원비를 충성스레 지불한다. 꼭꼭 씹어서 턱밑까지 대령하는 공부에 익숙해진 아이들. 학원을 가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은 셀 수 없다.


정답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단, 학원은 필요한 영역에서 적절한 조력자일 뿐인데 맹목적인 숭배 대상이 되는 순간, 자립할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은 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정보를 검색하고, 취사선택하여 통합한 후 평가와 재평가를 거쳐 조정하고 재통합하는 전체 과정을 통과할 때 자신만의 고유한 아웃풋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처음에는 시간과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많이 쏟아부어야 하지만, 시행착오 끝에 점점 효율적인 방법을 체득하고 자신의 길을 찾는 것, 이것이야 말로 능동적인 자기 학습 자산이자 홀로서기 핵심과정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학교의 원칙으로 주지교과(미술, 음악, 체육 등의 예체능 기능 교과 이외에 지식과 이론 위주의 국어, 수학, 과학 등의 교과)의 사교육 금지 조항이 있다. 황금 같은 아동기가 머리를 채워 넣는 학원 스케줄로 이리저리 치여 압착되지 않도록, 마음껏 이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경험을 즐기며 세상을 탐색하도록, 학습의 홀로서기를 훈련하고 독려하도록 여러 가지 취지에서 생긴 규정인 듯하다. 만일 이 규정을 어기면 학부모 면담이 이루어지고, 계속 시정이 안될 경우에는

더 이상 이 학교 학생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주지교과 사교육 금지. 아이가 더 크고 학년이 높아지면 어떤 불안이 생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기조이다. 선배 학부모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으며 주변에 밤늦게까지 학습지나 학원 교육으로 지친 아이들이 없어서 안심이다. 고학년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방과 후에 학교 도서관에 남아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놀기도 하며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관리하는 풍경 또한 아름답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기에 예전과 비교하면 안 된다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시절만큼은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을 집에 던져두고 하루 종일 놀이터에서 친구, 동생,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놀다가 엄마가 불러야 겨우 저녁 먹으러 집으로 들어갔던 그 시절이 더 그립다. 그렇게 헐렁하게 보냈어도 그냥저냥 밥벌이해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쪼임에 쪼임을 당하는 초등시절이 과연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할까? 고민해 볼 일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찾으면 그 하나에 집중하지만 어리석은 이는 이것저것 건드리며 '왜 나는 뛰어난 사람이 되지 못할까?'하고 고민한다. 선행학습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대신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기회를 갖게 하고, 그것에 오롯이 집중하게 하는 부모의 지혜가 그래서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 <학력파괴자들>, 정선주 -

매거진의 이전글학부모 교육: 완벽이 아닌, 부족을 줄이는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