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학부모, 어설픈 한해살이
안 맞는 복장이 있을 뿐, 나쁜 날씨는 없다
스코틀랜드에 이런 속담이 있다.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다. 맞지 않는 복장이 있을 뿐이다."
햇볕이 쨍쨍한 날, 비나 눈이 오는 날, 바람이 부는 날, 구름이 껴서 흐린 날 등 날씨는 다양하다. 사람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날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기상 현상에 호불호는 존재하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은 없다는 점이다. 자연 현상 자체는 언제나 중립이다. 우리의 반응 때문에 긍정과 부정,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값이 붙을 뿐이다.
'젠장, 비 때문에 옷이 흠뻑 젖었어!'
'이런, 햇빛이 너무 강해. 피부가 다 익어버렸어!'
비 오는 날씨를 탓하기보다 우산과 장화를 챙기면 되고, 뜨거운 햇살에 불평하기보다 선크림과 모자를 준비하면 된다. 적절하지 않은 차림으로 날씨를 바라보면 불평이 생기지만 날씨에 옷을 맞추면 탓할 일이 없다.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는 것이다.
아이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모든 아이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씨앗을 품고 태어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것은 각각의 개별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가치 판단이 배재된, 개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이의 때를 앞당기려 조바심 내지 말고, 아이의 현재 날씨가 왜 이럴까 걱정하지도 말고, 자의로 바꿀 수 없는 날씨처럼 아이의 시기를 주어진 것으로 바라봐 준다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옷을 바꿔 입는 것이다.
어쩌다 학부모라는 옷을 입게 되었다. 1살짜리 학부모 가 어설프게 한해살이를 마무리하며 도달한 결론이 있다. '왜 이럴까'가 아니라 '그러니까'로 시선의 각도를 살짝 트는 것, 엄마의 옷을 바꿔 입는 것이다.
유아에서 어린이로 갓 들어선 초등학교 입학 첫날, 혼자 교실로 올라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 품에 있던 갓난쟁이가 언제 저렇게 커서 혼자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니. 대견한 마음 반, 짠한 마음이 반이었던 것 같다. 난생처음 학교라는 곳에 들어섰는데 첫째 날부터 엄마가 아이를 교실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금지되었다. 신입생들의 독립과 적응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입구에서부터 아이 혼자 교실까지 가도록 하는 것이 학교의 원칙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엄마 손을 잡고 어린이집 문 앞까지 갔는데, 멀찍이에서 아이의 손을 떼어 내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교실을 제대로 찾아갈 수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마조마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보내 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교실을 찾아 떠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불안한 모성만 지질하게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가 집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등하교 라이딩을 해야 한다. 3월 한 달이 지나니, 아이가 혼자 드롭존에서 내려 교실로 올라가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드롭존에서 내려주면 아이는 곧장 교실로 올라가고 엄마는 바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면 되니 시간적 효율성은 최고다. 그럼에도 아들은 굳이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손을 잡고 교사 입구까지 엄마가 함께 걸어가 주기를 바랐다. 입학 후 첫 한 달은 모든 것이 낯선 공간에서 엄마라는 익숙함에 기대고 싶은 그 마음이 백분 이해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드롭존에서 내리는 것을 거부한다.
"드롭존에서 내리기 싫어요. 주차장에서 내려서 엄마랑 같이 손잡고 갈래요."
다른 친구들은 한 달도 안 되어 드롭존에서 내린다던데, 이 아이는 왜 이럴까? 적응이 힘든 걸까? 꽤나 긴 시간 동안 장소를 우회하여 손을 잡고 입구까지 함께 걸어가 주었다. 드롭존에서 억지로 내려주고 갈 수도 없어서 아이의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 석 달쯤 지나자 아들은 차츰 엄마 품에서 벗어날 용기를 냈다. 이제, 주차장이 아닌 무조건 드롭존이다. 가끔 학교에 일찍 도착할 때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유롭게 손잡고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든다. 살짝 마음을 떠보면 이런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드롭존이요!"를 외친다.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올라가던 학기 초가 그리울 때도 있다.
아쉽지만 날씨가 바뀌었다. 이전에는 억지로 드롭존에 내려줄 수 없었다면 지금은 억지로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없다. 예전처럼 '왜 이럴까' 했던 조급증과 서운함을 벗어던지고 '그러니까'의 옷을 입는다. 네가 이만큼 성장했구나. 그러니까 엄마의 마음을 접고, 너의 보폭에 맞춰줄게. 아이의 시기가 바뀌었으니 변화된 날씨에 엄마가 맞춰주는 것이 아이의 성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아닐까.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는 은연중에 선후 관계, 인과 관계 등 주어진 상황을 해체하고 분해하여 본인이 선택한 노선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들을 긁어모은다. '이래서 내가 이럴 수밖에 없다.'는 나만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혹은 나의 치명적인 취약성을 가리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쓴다. 내부가 아닌 외부의 탓이라는 숨겨진 아집 때문이다. 꽉 쪼여진 판단과 평가의 나사를 살짝 풀어 보면 어떨까.
'우쒸, 영하로 떨어져서 편하게 밖에 나갈 수도 없네.'
'영하로 떨어진다니 옷을 겹겹이 따뜻하게 입고 나가야겠어.'
같은 상황이지만 '때문에'가 아니라 '그러니'로 렌즈를 바꾸면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도 된다. 부드러운 시선은 바라보는 각도와 초점을 어디로 옮겨 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삶의 태도 역시 변한다. 세상의 진리는 자기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나의 논리를 뒷받침할 근거를 찾다 보면 나 혹은 나의 논리 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게 된다. 불평할 구실을 찾기보다 유연한 시선, 살짝 허용적인 삶의 태도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