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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Jul 18. 2022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의 부모

상담일지 #1

어떤 날엔 상담소로 들어온 내담자의 부모님과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내 내담자 중에 몇 명의 청소년이 있다. 오늘은 그중 한 명의 어머니가 상담소에 오셨다. 아이가 겪은 성폭력 사건이 불기소 처분이 났단다. 당시 상황에 협박이나 무력이 없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경찰의 불송치이유서를 보여주셨다. 우리 아이는 요즘 잘 지내는 것 같다며 아이에게 말하지 않고 사건을 정리하고 싶다고 하신다. 괜히 아이에게 사건 얘길 꺼냈다가 잘 지내는 아이의 일상을 망치게 될까 봐 걱정이라고 하셨다.


어떤 청소년들은 참 해맑아 보인다. '그런 일'을 겪고도 배슬배슬 웃는 아이들을 볼 때면 부모와 양육자는 속이 타들어간다. "우리 애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애는 지가 겪은 일이 뭔지는 아는 걸까요?" 본인들도 모르게 성폭력 피해자인 청소년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이다. 힘들다고 엉엉 울고,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아야 할 것 같은데 어쩐지 매일 친구들을 찾는다. 점점 짧아지는 치마, 머리와 화장에만 신경 쓰는 모습, 친구에게 또는 휴대폰과 다이어트에 목숨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목숨을 걸기도 한다. 집에서 소리를 지르고, 어른의 말을 무시하고 비꼰다. "쟤는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요." "커서 뭐가 될지 모르겠어요." 라며 눈물을 보이는 엄마들. 아! 왜 상담소에는 엄마들만 오는 걸까! 아빠들도 만나고 싶다.


성폭력 상담소를 찾아오는 청소년들에겐 부모가 있다. 이건 내 편견이 아니라 어떤 장면들이 겹쳐져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이다. 일단 본인 사건을 직접 신고하는 청소년이 별로 없다. 대부분 어른들에게 '걸려서' 상담소에 온다. 경찰서에 가는 청소년도 마찬가지. 부모와 사이가 멀거나 부모가 없는 청소년들은 애초에 부모에게 걸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성폭력을 당해도 상담소까지 오지 않게 된다.


몇 달에 한 번 이른 저녁, 거리로 청소년을 만나러 캠페인을 나간다. 성폭력 상담소 리플릿을 주며 말을 건넨다. "성폭력 당하면 상담소로 오세요.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상담받으실 수 있어요." "주변에 성폭력 피해 겪은 친구 없어요? 있으면 그 친구한테 이 리플릿을 좀 전해 주세요." 꽤 간절하게 말을 붙인다. 지금 내게 리플릿을 받는 이 사람도 성폭력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은 성폭력 피해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발 상담소라는 곳을 그 친구에게 알려주길 바라면서.



리플릿을 받아 든 한 청소년이 물었다. "10년 전 사건도 상담받을 수 있어요? 어렸을 때 뭐가 있었거든요. 엄마한테 말했는데 엄마가 경찰에 신고하지 말자고 했어요." 철렁 내려앉을 것 같은 심장을 민들레 씨앗 솜털 붙잡듯이 조심스럽게 부여잡고 답한다. 내가 여기서 지금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 사람은 다신 자신의 피해경험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땀 한 방울이 삐질 피부를 삐져나온다. "물론이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와도 괜찮아요. 10년 전에 용기 내서 말했을 텐데 엄마가 경찰 신고하지 말라고 해서 많이 놀랐을 것 같아요." "... 괜찮아요. 옛날 일이라." "그래요?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하고 싶다, 그런 게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래도 괜찮아요. 나중에 고민되는 일 생기면 상담소로 전화 주세요. 혼자 고민 많이 했겠네요." "네"


애들한테 사건이 없으리란 것은 어른의 기대와 희망일 뿐이다. 애들은 항상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또래 관계 이기도 하고, 선생이기도 하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이웃, 친척, 그리고 많은 경우에 부모 그 자체가 애들을 상대로 성폭력이란 짓을 벌인다. 애들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축소하고 각색해서 강해 보이는 어른에게 말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보호받지 못했을 때, 어떤 청소년 사람이 또다시 어른을 믿고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을까? 청소년이 어른을 믿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애들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잊고 잘 지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어른의 기대와 희망이다. 애들은 누구보다도 많이 사건에 대해 생각한다. 사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생각까지도 사실은 사건에 대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더 '쌔' 보이고 싶어서 짧은 치마, 짙은 화장, 담배, 술을 가까이하는 청소년들을 보며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다며 답답해한다. 답답하신 마음을 너무 이해한다. 그렇지만 답답해하는 건 아이를 보호하지도 못하고 상황을 바꿔주지도 않는다.


아이에게 다 말해주시길 권한다. 경찰관이 너의 사건을 어떻게 수사하고 있는지, 가해자가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너의 사건이 검찰로 송치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아이들은 자신의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


물론 말해줘 봐야 귓등으로 들은 건지 콧구멍으로 들은 건지 신경도 안 쓰는 애들이 분명히 있다. 근데 그건 말을 해줘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양육자 자신을 돌아보시는 방향을 권하고 싶다. 아이의 인생과 내 인생의 경계를 흩뜨려놓은 사람은 누구인가. 아이인가? 나인가?


어떤 아이는 자신의 억울함을 쏟아 낸다. 상담소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엉엉 울며 억울하다고 목놓아 소리 지른다. 어떤 아이는 혼란스럽지만 수용하기도 한다.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경찰서 왔다 갔다 고생하는 것도 싫고 애들이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지겹고 이제 다 그만하고 싶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겠지만 적어도 엄마 아빠 걱정 때문에 사건을 접겠다고 한다면 그 아이의 의견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부모님을 많이 사랑한다. 내게 이 세상을 선물한 부모라는 사람을 이 세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게 아이들이다. 대부분 아이들은 자신보다 부모를 더 많이 사랑한다. 나보다 부모를 우선순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런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건 아이의 착한 마음을 어른의 뜻대로 이용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 보호의 종류와 방법은 유아기와 어린이 시절,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 단계마다 달라져야 한다. 아이 앞에서, 아이보다 위에서, 아이를 대신해서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보호는 어린이 단계에서 끝내야 한다. 청소년기가 되면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아이의 옆으로, 혹은 뒤로 가셔야 한다. 관계를 수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는 차츰 부모와 어른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게 되고 결국 어른들은 아이를 잃게 된다.  


벌써 이렇게나 많이 말을 해 버렸다. 오늘 상담실에서 내가 왜 눈물이 났는지 얘기하려고 노트북을 폈는데 시작도 하지 못하고 글을 맺게 생겼다. 아이들이 어른에게 말하지 않을 때, 그 이유는 어른에게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한 아이, 혹은  두 명, 세 명의 아이에게 온 세상이 되어 주고 있는 위대한 부모, 당신에게 이런 말까지 하게 되어서 정말 미안하지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겐 1년 남짓 본 상담 선생님보다 부모의 웃는 얼굴 한 번 엿보는 게 더 중요한 걸?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마음이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말보다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이다. 불안과 강박이 있기 때문이다. 듣기에 보기에 읽기에 여러모로 내 글은 불편할 것이다. 나는 꼰대가 맞다. 자기반성이 부족한 것도 맞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는 도통 뒤로 물러나질 않는 사람이다.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게 성폭력 피해자 편에 서는 사람이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맞고 틀림을 말하냐고? 내가 뭔가 잘나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뱉어야 했던 말을 뱉는 자연스러운 시간이다. 부침과 과오가 있겠지만 계속 뱉어낼 생각이다. 이 글은 앞으로도 성폭력을 다룰 것이고, 부모에게 자꾸만 뭐라 하는 내용이 태반이 될 계획이다.


이런 글을 쓰지 않으려고 1 반을 참았다.  브런치가 상담소에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내지르는 대숲이 되지는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험담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들이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아니까. 드디어 브런치에 상담소 이야기를   있게  , 이제  글은 험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대부분은 상담소에서 모두 해낼  있게 됐다. 이제야 정말 기록의 용도로 글을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품으며 앞으로 종종 브런치에 상담일지를 남겨보겠다는 각오를 다져 본다. 응ㅡ차.


 글에 나온 모든 사례는 실제 사례가 아니라 각색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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