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가는 응급실

by 보라

by 보라체

어릴 땐 누구나 자주 아픈가. 어려서부터 자주 아팠다.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도 가끔 아픈 날이 찾아왔다. 보통 그냥 참았다. 그냥 끙끙. 서러워서 눈물이 나는 날도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냥 아파하다가 덜덜 떨며 진통제를 찾아 털어 먹고 잠이 들었다.


날이 밝고 어제보다 덜 아픈 아침을 맞이하면 가족 단톡방에 '나 어제 아팠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엄마가 전화를 하고 어디가 아팠냐 그러니까 조심하지 그랬냐 아파서 어쩌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럼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정도 아픔으로는 이 정도 관심밖에 못 받는구나. 다음에 아플 때는 응급실 다녀왔다고 해야지.



다음에 또 아픈 밤이 찾아왔을 때, 끙끙 앓고 난 뒤 다음 날 아침에 가족단톡방에 썼다. "나 어제 아파서 응급실 다녀왔어." 그럼 가족 단톡방에 좀 이런저런 말이 나왔다. 아파서 어쩌냐. 혼자 퇴원했냐. 죽 먹어야 하는데 죽 사 올 수 있냐. 이런 거.


대화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내가 아파도 우리 가족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라고 느꼈다는 것. 단톡방이 웅성거리고, 걱정의 말이 담긴 전화가 걸려와도 정작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연극배우 같달까. '딸을 걱정하는 부모'역. 연극배우라고 하기엔 연기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느끼면서도 어쩐지 꼭 아프고 난 다음날에는 아팠다는 소식을 단톡방에 썼다. 가족들은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되뇌면서도, 이미 늦었고 지쳤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 일인지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고 아플 때마다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난 대체 어떤 말이 듣고 싶은 걸까.


탈가정 이후 애인과 같이 원룸에 살던 어느 날, 또 아픈 밤이 찾아왔다. 열이 펄펄 나고 땀이 흥건하고 계속 앓는 소리를 냈단다. 배가 아팠던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아픔이다. 특별하게도 이 날은 참지 않아도 되었다. 애인이 몇 시간 동안 나를 간호하다가 나를 깨워서 병원에 데려간 것이다.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아침에 같이 병원에서 나왔던 장면이 기억난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애인을 불러 물어본다.


그날 병원비를 네가 냈어?
응.
어머머 나 몰랐나 봐. 미안해. 고마워.
괜찮아 보라 씨. 보라 씨 안 아픈 게 제일 중요해. 이제 안 아프니까 다행이야. 괜찮아.


아프면 당연히 그냥 참아야 하는 줄 알았다. 응급실은 비싸니까 심하게 아픈 게 아니라면 그냥 참아야 하는 줄 알았다.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나 보다. 이런 생각을 30년 넘게 살고 나서야 처음 해본다.


그 이후로도 애인은 내가 아플 때마다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해준다. 애인과 함께 살면서부터는 엄청나게 아픈 밤이 찾아와도 서럽지가 않다. 기분 좋게 아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누가 내 말을 믿어줄까? 아파도 기분이 좋더라. 따뜻하게 보호받는 느낌. 아파도 괜찮은 느낌. 이 아픈 밤이 곧 지나갈 것 같은 밝은 느낌이 생겼다.


이 느낌을 느껴보고 나서야 원가족의 돌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그때 남 걱정하듯 그렇게 나를 걱정했구나.


이렇게 되고 나서야 생각나는 장면인데 스물몇 살 내 동생이 아팠던 어느 날이었다. 언뜻 보니 엄마가 걔 손을 잡고 이마에 손을 짚어주고 있었다. 엥. 느끼하게 왜 저래. 그땐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한 번도 그런 간호를 받은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엄마가 본다면 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기억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정말 기억이 없다. 아마 그런 돌봄이 있었다면 그건 아마도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 아니었을까.


어느 날 동생에게 물어봤을 때, 동생이 그랬다. 얼마 전에 자기가 잘 때 엄마가 자기 손을 잡고 있었다고. 어렸을 때부터 가끔 그랬다고 하더라.


내 기억으론 엄마랑 내가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던 건 일곱 살 때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엄마는 우리가 튀어 나갈까 봐 걱정됐는지 손을 낚아채 잡았다. 엄마는 오른손으로 나를, 왼손으로 내 동생 손을 잡았다. 그때 우리 앞으로 택시가 쌩 하고 지나갔고,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줄 알았던 우리 엄마가 택시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야! 애들 다치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 말이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엄마의 사랑 표현이다. 물론 '사랑해'처럼 사랑표현 100%로 가득 찬 말은 아니다. 0.03% 사랑맛이 가미된 사랑맛표현이라고 하면 될까.


그 이후 엄청 오랜 시간 동안 이 날을 생각했다. 장소도 상세히 기억난다. 이 장면을 곱씹으면서 그래도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하긴 한다며 위안을 삼은 게 수십 년 째다. 탈가정 전, 지난날의 내가 불쌍하고 가엾다.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이 외마디를 사랑표현이라 곱씹다니.


아플 때마다 꼭 가족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며 받고 싶었던 답장은 무엇일까. 걱정하는 말로 가득 찬 가족들이 답장이 성에 차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는 것을. 그저 그 말이면 됐다는 것을.


"우리 딸, 아파서 어떡해.
엄마가 안아줄게.
사랑해 우리 딸."


매거진 [탈가정 도망자들]은 앞으로 10주 동안 탈가정청년당사자모임 [탈탈탈]의 멤버 - 보라, 아린, 슈크림, 써니, 지선 - 이 쓴 글이 올라옵니다. 주제는 매주 돌아가면서 제안하고, 이번 글의 주제는 [탈가정 이후 아픔을 대하는 나]였습니다.

※탈가정청년 : 원가족과 이별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청년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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